中庸 강독

 

서론

 

사실 중용을 접한 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진가를 느끼며 나의 공부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녹색대학에 와서 물질 생명 인간 강의와 함께 생명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후부터이며, 더욱 불을 지른 것은 몇 년 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EBS TV를 통해 中庸, 인간의 맛이란 명 강의를 하게 된 후부터이다. 먼저 생명의 문제를 생각할 때, 중용에서 나에게 가장 필이 꽂힌문장은 제10장의 和而不流였다.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 않는다는 군자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 주석도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생명에 대한 상상력을 즐기던 시기에 매우 와닿는 표현이었다. 그 이후 중용을 여러 차례 보면서 화이불류란 문구를 가능하게 했던 중용 전체의 체계, 더 나아가 중국 철학의 전체적인 배경을 이해하면서 중용은 가히 생명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저임을 깨닫게 되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이자 제자인 자사 선생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 공자의 위대한 사상을 더욱 진전시켜 유가 철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중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용은 처음부터 독립된 경전으로서 자리하지는 못했다. <大學>과 함께 5경 중 하나인 <禮記> 안에 포함되어 오랫동안 전해져 오던 글이지만 일찍부터 중시되어 단행본으로 행세해왔으며 송()대에 이르러 더욱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희 이전 정호 정이 형제가 크게 중시한 이후 드디어 주희에 이르러 <논어>, <맹자>, <대학>과 함께 사서로 편정되었다. 주희는 사서의 독서법을 이름에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먼저 <대학>을 읽어 유학의 대강을 파악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 근본을 확립하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 <논어>의 주제가 발전되어 가는 그 논리를 파악하고, 최후로 <중용>을 읽어 고인들의 미묘한 사유체계를 추구해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중용에는 얼마나 미묘한 사유체계가 들어있을까? 2500년이 지난 지금 중용은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생태문화공간 창조의 이념을 가지며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는 온배움터에 중용은 과연 어떤 책일까 생각하며, 매주 월요일 고전을 좋아하는 이중렬, 정미은샘과 다시 한번 그 뜻을 음미하고 있다.

 

이제 자사가 중용을 집필하며 그 서론 격으로 쓴 제 1장을 먼저 정리하고 나의 생각을 간단히 덧붙여볼까 한다. 지난 열린 특강에서 생태문화공간과 온생명, 온배움, 즉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개념이 중용 제 1, 그것도 첫 번째 문장 속에 모두 융해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중용은 온 인류의 가장 위대한 철학과 이념을 담은 결정판이기에 그만큼 생태문화공간 창조의 가치란 더욱 위대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사업에 뛰어든 우리 온배움터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극복하며 함께 노력하고 공부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제 1장을 정리하면서 다시금 우리의 각오를 새겨보기로 한다.

 

1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라 하고, 도를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라고 한다.

 

정말 이 제1장은 몇 십 번을 쓰고, 몇 백 번을 읽고, 몇 천 번을 되뇌이게 되는 중용 전체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동양에서 하늘, 하느님()은 서양의 절대자이며 유일신과는 다르다. 인간이 삶의 터전을 삼고 살아가는 우리의 대 자연이다. 이 대 자연이 명한 것, 특히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들에게 명하는 그것이 바로 성이며, 그 명을 따라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올바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이 대자연에는 춘하추동이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고, 식물은 철에 따라 변함없이 피고 짐을 계속하며, 심지어 동물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에 따라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 어느 하나 하늘이 명한 성을 따라 꿋꿋이 길을 걸어가지 않는 존재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하늘이 명한 성을 충실히 따르지 않을 선택권을 가졌으며, 동시에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가르침과 배움(깨달음)을 통해 진실로 하늘이 명한 성을 올바로 따르는 길을 잘 닦음으로써 결국 천지인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결국 성인에 이르는 것이요, 천지는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대자연은 결국 지구 생태계, 온생명과 연결지을 수 있고, 이 온생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온생명적 의식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배움을 통해 길을 닦을 수밖에 없으며, 그 배움이 바로 온배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개체 생명들이 스스로 온생명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국소적 자아로부터 확장된 자아 (眞如)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은 생태계라 말할 수 있고, 는 결국 인류만이 누릴 수 있는 문화, 문명의 의미인 것이다. 생태문화공간이란 바로 하늘이 명한 것을 우리 인간이 배움이라는 문화적 활동으로 깨닫고 그 길을 올바로 가는 공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중용은 처음 1장의 첫마디가 이와 같은 웅혼한 사고로 시작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 이르는 내내 우리에게 생태문화공간 창조를 위한 지침서를 매우 세밀하고 멋지게 전해주고 있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라는 것은 잠시(須臾)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데서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 도는 결코 보통의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고상한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 옆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 생활을 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농사를 짓고, 놀이를 하는 그 모든 행위에는 도가 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도가 있지만 그 도를 실천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그것을 깨우치려면 매우 지극한 경지에까지 우리의 배움이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늘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도이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있든, 혼자 있든 다르지 않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듣지 않는다고 해서 나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 스스로를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그 홀로 있음을 군자는 매우 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愼獨 사상은 기독교든 불교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시된 개념이기도 하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성경의 복음서인 누가복음 12:2-3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이 옥상 위에서 선포되리라.”

 

중용의 말과 매우 정확한 일치이다. 성경이나 고전들을 읽다보면 시대적 상황이나 지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일치하는 표현들을 남겼을 까 놀라울 때가 많다. 이 구절이 대표적이다. 결국 우리 인간은 홀로 있음이 깨달음으로 이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늘 누구와 함께 하고, 늘 웃고 즐기고 떠드는 시간을 가져서는 안 된다. 스스로 돌아보며 홀로 삼가는 시간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는 상태를 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라고 일컫는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하는 길이다.

 

처음에 언급한 , 즉 우리 속의 하느님을 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을 지닌 인간으로서 희로애락을 발현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정이 매우 절도에 맞아야 진정 군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은 곧 거대한 근본일 수밖에 없고, 화는 바로 성을 따르는 도일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모두 화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과 화를 지극한 경지까지 밀고 나가면 천과 지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만물이 자라나게 된다.

 

21세기 과학기술 문명이 극에 달하여, 인류는 천지 대자연의 상황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어찌 보면 대자연이 인류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수많은 재앙이 그 사실을 말해 준다. 결국 온생명의 건강은 인류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인류가 중과 화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즉 온생명을 몸으로, 마음으로 인식한다면 결코 자연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 속에서 우주 만물은 안전하게 자라나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결국 자연의 도는 영특한 지혜로 문명을 일으킨 인간이 온배움을 통해 본래 자연이 명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천지와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온배움터의 생태문화공간 창조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2장부터는 공자의 말씀을 중심으로 위대한 자사의 사상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이 진행된다. 인문 고전은 결코 죽은 교과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 사상을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바탕이 된다. 우리 온배움터가 철학과 과학은 물론, 인문 고전과 더불어 온배움을 추구함으로써 온생명을 로 받아들이는 배움터가 되기를 희망하며, 중용 강독에 더욱 정진하고자 한다.

 

중용 1장 원문과 해석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늘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라 하고, 도를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라고 한다.

라는 것은 잠시(須臾)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데서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는 상태를 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라고 일컫는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하는 길이다.

중과 화를 지극한 경지까지 밀고 나가면 천과 지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만물이 자라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