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매우 의미 있고 감동 깊었던 도올 김용옥의 ebs 특강 ‘中庸, 인간의 맛’이 어제 마무리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몇해전부터 자연과 인간을 공부하는 연구자로서 ‘중용’에서 나온 ‘화이불류’[和而不流: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 論語 13-23에도 유사한 말 화이부동(和而不動)이 있다.]가 생명의 참모습이라 깨닫고 ‘중용’를 통해 진리를 모색해보고자 했었는데 그저 마음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도올의 중용 강의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 저에겐 너무나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중용 해석에 있어서 무수한 반론을 던질 수 있지만 현재의 시간, 현재의 상황에서 고전을 읽고 그것을 새롭게 하는 그의 노력은 매우 소중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의 마지막 강의를 통해 본인이 학교 시절 중용 수업에서 다음의 문구를 듣고 눈물을 쏟아 부었던 에피소드를 밝히고 있더군요. 글쎄 지금 많은 젊은이들이 과연 이 사실에 얼마나 공감을 할 지는 모르겠네요. 별로 감동적이거나 애처롭지 않게 느껴지니까요.

 

 

중용의 저자 子思는 20장부터 천지자연의 핵심인 ‘성(誠)론’을 펼치며 26장에 와서 천지의 드높고, 드넓고 두텁고 밝고 아득한 도를 찬양하는 문학적 표현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특히 땅의 박후(博厚)함을 예찬하며 이렇게 읊고 있네요.

 

 

今夫地, 一撮土地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이제 저 땅을 보라! 한 줌의 흙이 모인 것 같으나, 그것이 드넓고 두터운데 이르러서는 보라! 화악(거대한 산)을 등에 업고도 무거운 줄을 모르며, 황하와 황해를 가슴에 품었어도 그것이 샐 줄을 모르지 아니하뇨! 만물을 싣는도다!>

 

 

이 자연의 위대함에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네요. 지금 보니까 그의 눈물이 이해가 갑니다. 아무리 훌륭한 고전의 말씀이라도 읽는 이의 마음속에 문제의식이 없다면 그저 도움이 되는 이야기 정도이겠지만, 철저한 문제의식과 치열한 물음, 그리고 순수한 감수성으로 대했을 때 무언가 FEEL이 꽂히는 말을 듣게 되면 저절로, 복받쳐 눈물을 쏟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눈물 뒤에 남는 것은 그 개인의 성장이요, 무언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이 찾아오게 될 겁니다. 과연 살아오면서 저는 어떤 말씀에 마음 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눈물을 쏟은 적이 있는가 돌아봅니다. 엉엉 울지는 못했어도 보이지 않게 목이 멘 적이 여러번 기억이 납니다.

 

중용 26장은 이 문구로 시작합니다.

 

故知誠無息. <그러므로 지극한 성은 쉼이 없다.>

 

일순간 쉼이 없는 대자연의 창조력과 우주의 생명력을 성(誠)이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윤리, 우리의 도덕, 우리의 학문하는 자세는 모두 이 대자연의 誠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이 아닌 불인(不仁)한 대자연은 오로지 쉼이 없는 성실함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반복하여 기능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나이에 불문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쉴 새 없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천지자연과 같이, 쉼 없이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고 몸을 닦고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학문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꼭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혼을 담은 장인의 경지, 이론 없이도 자연과 한 몸처럼 생활하는 농촌 어르신들의 경지 역시 至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양의 고전은 위대합니다. 2500년 전의 孔子가, 子思가 다시 우리의 정신 속에, 우리의 몸 속에, 우리의 삶 속에 부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