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이어서 말씀드린 부처의 낑수까 나무 비유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출처:다음 블로그 행복한순간)

~ 그때 어떤 비구가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 비구의 봄[見]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비구의 봄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다.


3. 그러자 그 비구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다른 비구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 비구의 봄[見]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비구의 봄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다.


4. 그 비구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다른 비구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 비구의 봄[見]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네 가지 근본물질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비구의 봄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다.


5. 그 비구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다른 비구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른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 비구의 봄[見]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까?

도반이여, 비구가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비구의 봄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다.


6. 그러자 그 비구는 그의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비구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다른 비구들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세존을 뵈로 왔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비구의 봄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까?


7. 비구여, 예를 들면 일찍이 낑수까 나무를 본적이 없는 사람이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다가간다 하자. 그는 그 사람에게 가서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검은 것인데 마치 타다 남은 그루터기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있던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의 질문에 대한 다른 사람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서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붉은 것인데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있던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의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사람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서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껍질이 길게 늘어뜨려지고 꼬투리가 터진 것이 마치 아카시아 나무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있던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의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사람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여 낑수까 나무를 본 적이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서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여보시오, 낑수까 나무는 많은  잎사귀를 가지고 있어서 큰 그늘을 드리우는데 마치 니그로다 나무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있던 낑수까 나무는 그 사람이 본 것처럼 그렇게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8. 비구여, 이와 같이 그들 확신을 가진 참된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청정한 봄에 따라서 설명을 한 것이다.

비구여,  예를 들면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깊은 해자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여섯 개의 대문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문지기가 있어, 모르는 자들은 제지하고 아는 자들만 들어가게 한다.

그때 동쪽으로부터 재빠른 전령 두 명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여보시오, 지금 이 도시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말하면 그는 '지금 그 분은 중앙광장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때 서쪽으로부터,,,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부터,,,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9. 비구여, 이 비구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여, 도시라는 것은 네 가지 근본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두고 한 말이니 이 몸은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여, 여섯 개의 대문이란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문지기란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재빠른 전령 두 명이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성주는 알음알이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중앙 광장이란 네 가지 근본 물질을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이다.

비구여, 있는 그대로의 말씀이란 열반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들어온 길이란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3주차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다음 오픈노하우)


플라톤은 그가 말하는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커다란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몇 사람의 죄수들을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 곳에서 그들의 발과 목에 사슬을 묶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고 상정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머리를 돌릴 수조차 없기 때문에 단지 그들의 전방에 존재하는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뒤에는 그들이 앉아 있는 바닥으로부터 돌연히 솟아오른 높은 지대가 있다. 이 높은 지대에는 물건들을 나르면서 앞뒤로 걷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르는 물건들은 나무와 돌과 그 밖의 다양한 물질들로 만들어진 동물과 인간의 상(像)들이었다. 이 걷고 있는 사람의 뒤에는 불이 있고, 그보다 훨씬 뒤에 동굴의 입구가 있다. 족쇄에 묶여 있는 죄수들은 단지 동굴의 벽만을 볼 수 있을 뿐, 서로를 보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 뒤에 있는 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앞에 있는 벽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이며, 그 그림자는 사람들이 불 앞으로 걸을 때 비친 반영이었다. 그들은 대상물이나 그것을 나르는 사람을 결코 볼 수 없으며, 그 그림자들이 다른 사물들의 그림자인지 어떤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한 그림자를 보며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벽에 반사된 메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소리가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밖에 다른 것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죄수들은 벽에 만들어진 그림자들만을 인식하게 될 뿐이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이 죄수들 중 한 사람이 그의 족쇄를 풀고 일어나 주위를 돌아 불빛을 향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처음에 그의 모든 운동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벽을 통해 그림자를 보는데 익숙했던 그 움직이는 대상들을 직접 보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혹시 이 움직이는 대상물들이 그림자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또는 그 대상이 그의 눈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만일 그가 불 자체로부터 직접 나오는 빛을 보게 된다면, 그의 눈이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 때 틀림없이 그는 그를 풀어준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그가 아무런 모순 없이 경험할 수 있었던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려 할 것이다. 그 그림자들이 그가 불빛 속에서 보았던 실존하는 대상물보다 더욱 분명한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 죄수가 되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동굴 입구로 통하는 가파르고 험준한 통로를 통해 강제적으로 끌려와 태양빛을 접하게 된 후를 생각해보자. 태양 광선은 눈에 매우 고통스러운 충격을 주게 되고, 그는 그가 방금 실재적이라고 믿었던 어떠한 사물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눈이 동굴 외부의 세계에 익숙해지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 그는 몇몇 그림자들을 인지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친밀감을 가질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그림자라면, 그는 이전에 그것이 동굴의 벽에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모양을 보게 될 것이며, 수면에 비친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들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지식에 있어 중요한 전환, 또는 진보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때 순전히 어둡고 흐린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이제 좀더 세밀한 선과 색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의 경우, 그림자로는 실제의 모습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에 비친 꽃잎의 상은 시각에 하나하나의 잎새와 놀랍고 다양한 색상을 보다 분명하게 제공해준다. 이윽고 그는 꽃 자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눈을 하늘로 쳐들었을 때, 그는 밤에 빛나는 하늘의 물체들, 달과 별과 은하수를 보는 것이 대낮의 태양을 보는 것보다 용이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로 보게 될 것이며, 더 이상 그림자나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을 통하여 그것을 경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비상한 체험을 통해 그 풀려난 죄수는 점차적으로 사물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태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계절들과 사물의 온갖 변화를 이끄는 것이 태양이며, 그 밖의 많은 사물이 그와 같이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동굴의 벽에서 보았던 것, 즉 그림자 반영들과 가시계(可視界)에 실재하는 사물들과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태양 없이는 가시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 죄수는 동굴 속에서의 삶에 대해 어떻게 느끼게 될 것인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지혜(知慧)라고 믿었던 것을, 즉 지나가는 그림자들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을 칭송하며, 그림자들이 진행되는 질서를 가장 훌륭하게 기억함으로써 다음에 올 그림자를 가장 잘 추측했던 사람에게 상을 주어 모두에게 존경하도록 하였던 행동 방식을 회상하면서, 동굴 속에서 자신이 존경하였던 인물을 부러워할 것인가? 

그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예전의 환경에서 벽면에 반영된 그림자들을 분별하는 데 다른 죄수들과 경쟁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대상들에 관해 다른 죄수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그 설명을 죄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죄수들은 그 상황을 매우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비웃을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의 시력은 완벽했으나, 이제 그는 시력을 상한 채 돌아왔다고,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속박에서 풀어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비유는 분명 인간을 동굴의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죄수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그림자의 불분명한 세계 주변에 자신들의 생각을 정향(定向)시켜 왔다. 교육의 기능은 인간을 동굴에서 빛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데 있다. 빛의 세계로의 이끌어냄은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부과하는 것 이상의 의미인 것처럼, 교육도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의 영혼에 지식을 주입시키는 문제 이상의 것이다. 지식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빛을 응시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죄수의 눈이 어둠 대신에 밝음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결박하고 있던 족쇄를 끊고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에 있어서도 영혼의 무지의 원인이 되는 변화와 욕망의 기만적인 세계와 전적으로 결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전회(轉回 : conversion)의 문제, 즉 현상계(現象界)로부터 실재계(實在界)로의 완전한 전회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이를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눈은 이미 시력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의 전회'는 영혼의 눈에 시력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방향으로 보는 대신에 마땅히 보아야 할 방향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고매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올바른 길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통치자들이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고양(高揚)시키기 위해서는 "강제를 통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굴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지고(至高)의 지식을 획득했을 때, 그들은 고결한 명상의 세계에 계속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동굴로 다시 내려와 죄수들의 생활과 노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세계, 즉 동굴의 어두운 세계와 빛의 밝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에 대한 그의 반론이었다. 플라톤에 있어 지식이란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확실한 것이었다. 지식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이 가장 실재적인 어떤 것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사물의 다양성과 계속적인 변화에 감염된 나머지 참된 지식의 가능성에 관해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므로 다양성을 띠게 되며 따라서 각자에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 준거하는 지식이 상대적이며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소피스트의 사고를 인정할 수 없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무지한 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모든 행위 속에서 그들이 목적하는 어떤 유일한 지표도 그들의 목전에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림자들뿐이라면 우리는 결코 믿을 만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실재적 대상의 운동들에 따라 크기와 모양에 있어서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은 매우 다양한 그림자들의 배후에 있는 유일한 "지표", 즉 "실재적" 대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신은 참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하나의 참된 이데아로서 정의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통치자나 사회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 다른 기준을 갖고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참된 정의의 이데아가 흐려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감각계(感覺界)와 가지계(可知界)를 구분한 배후에는 이러한 주 논의가 놓여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