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겨울, 온배움터에 서서

 

1. 그것은 따뜻함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진리라는 것은 멀리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생활의 작은 일들 속에서, 여러 가지 말 속에, 여러 미소 속에, 다양한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크리슈나무르티-

 

  올 2월에 온배움터에 접속하게 되었다. 아직 추운 겨울의 끝자락 아무도 없는 교정에 기숙사 한 켠을 보금자리 삼아 깃들었다. 온배움터를 떠났다가 2년여 끝에 다시 인연지어진 터라 다가오는 인연들이 모두 새롭고 감사했다.

  새벽에 함께 하는 몸풀기와 고전독송, 돌아가며 밥을 짓고 둘러앉아 먹는 밥상, 자전거여행을 떠났다가 섬여행이 되어버린 사건, 여름 뜨거웠던 건축현장, 비를 옴팡 맞으면서 걷던 백두대간, 밀양의 탑 아래에서 농사일을 거들던 몸짓. 학교 밭을 갈아 씨뿌리고 모자리를 내고, 심고 막걸리를 마시던 시간, 족구장에 모여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던 장면, 남해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며 물장구치던 날들. 계곡의 서늘함에 이불을 덮어쓰고 보낸 여름의 더위.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해서 만들어내었던 책장, 창고, 평상. 자기가 살 집을 직접 지어 내었던 작은 집짓기, 침뜸으로 직접 혹은 서로 몸을 살피고 돌보아주던 의술, 직접 농사지은 건강한 먹거리를 나누기 위해 다듬고, 포장하고, 예쁘게 디자인한 꾸러미. 직접 담궈 구들방에 발효시켜 먹어본 막걸리, 콩을 갈아 짜내 끓여먹었던 두부 그리고 조청. 나무화덕에 구워먹던 피자 그리고 난생 처음 만들어 구워낸 도자기 그릇. 큰 사건들은 아니지만 지나간 일상은 이렇게 크고 작은 많은 일들로 가득차 있다.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려보니 그 하나하나에 서로의 말이 들어있고, 생각이 차 있고, 미소가 가득하고 관계가 녹아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 빛나는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었구나. 사람들 속에 있었고 그것은 따뜻함이었고 즐거움이었구나.

 

2. 세상이 아프다.

 

  그대들이 내게 말한다. 삶은 감당키 어렵다라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아침에는 긍지를 가 졌다가 저녁에는 체념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세상이 참 아프다. 세월호의 아픔이 있었고, 정치의 일로 진보, 보수 대립은 날카로와져만 간다. 비정규직의 서글픔과 고단이 있고, 해고의 고통으로 삶은 망막하기만 하다. 경제는 어려워져만가고 정치는 대립으로만 치닫고 사회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사건사고가 계속해서 터져 나온다. 세계사적으로도 경제는 중국에 기대어 가고 안보는 미국에 몸을 맡겨두고 일본과는 감정의 골이 깊어만 간다. 북한 사회는 어떤 상황이고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되어갈까? 참으로 얼키고 설켜 어느 하나만 놓고 이렇다 저렇다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로 가득차 있는 거 같다. 그러나 거대한 흐름은 사람의 가치는 점점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지고 물질의 가치로 세상은 움직여가고 있는 거 같다. 물질 중심의 차가운 사회로 진행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까움이 크기만 하다.

 

3. 내가 서 있는 자리

 

  모든 오해와 혼란의 근원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크리슈나무르티-

 

  나의 어머니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태어나셨고, 해방되고 6.25 동란을 거치면서 험난한 시대를 고단하게 살아오셨다. 가난으로 점철된 일상을 오직 자식들 잘 먹이고 교육시키기 위한 일념으로 한 생을 다하셨다. 그 덕택일까. 돌이켜보면 참으로 나는 밥 굶는 걱정 없이, 절대적 가난의 고통 없이 먹고 자고 교육받으며 자라날 수 있었다. 이 시대 모든 부모들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바탕에 우리 세대가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학 들어가서는 선배들의 빛나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들을 살피면서 그 성과로 생각과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며 지낼 수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이어짐 없이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들은 모두 우리 부모 세대들이 이룩한 경제성과와 선배 세대들이 일궈논 민주적 장치 속에서 그 혜택을 누리고만 있는 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경제성장의 이면에 자리한 경제 양극화와 제도적 민주화 이면의 형식적 차가움이 도사리고 심지어 만연되어 있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을 누구의 탓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똑바로 바로잡아 놓으라고 요구만 하고 있기에는, 싸워서 쟁취하자고만 하기에는 뭔가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는 거 같다. 대체 무엇과 싸워야 하며 누구를 탓하여야 하고 어디에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정말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우리의 부모이고 우리의 선배들이지 않겠는가.

 

4. 그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 유일하게 남은 문제는 지도를 직접 제작하는 것, 직접 도구를 들고 서 삶의 여러 선들을 그려 보는 것이다. 쓰기, 그리기, 노래하기, 먹기, 달리기, 숨쉬기.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김해완-

 

  그 답답함이 온배움터에 인연되게 했는 지 모르겠다. 부모세대의 경제화와 선배세대의 민주화의 다음 문턱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넘어서길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적 경제성장을 넘어선 질적 경제로의 진입, 형식적 민주화를 넘어선 수평적 소통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 중심의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온배움터에서 실험하고 실천해볼 수는 없을까. 사회 전체로는 너무나 큰 모더니티의 한계에 휩싸여 이러한 실험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렇기에 온배움터에서의 삶이 비록 공간적으로 제약적이고 수적으로 얼마되지 않지만 저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 거구나. 저렇게도 해보면 되겠구나. 저렇게도 살아가지는 구나.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보편성을 띄고 나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실험이라고 하지만 희생의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기획된 프로그램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실제 자기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이 실제의 삶이 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보자는 것이다.

 

5. 세상 속으로

 

  진리라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 똑같은 미소를 보더라도 그 미소를 새롭게 보는 것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새롭게 보는 것이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무를 새롭게 보는 것이고, 인생을 새롭게 맞이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크리슈나무르티-

 

  자연과 더불어 땅에 씨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삶이, 스스로 집을 짓고 자기 먹을거리는 손수 키워내는 삶이, 자기를 위한 삶이, 자기개체를 넘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함께 하는 정다운 삶이. 그런 삶이 그저 좋은 그래서 그냥 하고 싶고 살고 싶은 삶 말이다. 물질적으로 넘치지 않아도 살아가기에 풍족하고 서로 가진 재능을 나누어서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지역에 있어도 3세계 민중과 할 수 있는 연대를 도모하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정치적 행위에 무관심하지 않은 삶. 스스로의 삶도 풍요롭고 후세대를 위해서도 터전을 고려할 수 있는 그런 삶. 혹 여러 다양한 삶들이 펼쳐지는 가능성의 장으로서 온배움터가 작동되면 좋겠다. 그 속에서 자기를 온전히 살아낼 수만 있다면, 세상 어디인들 가지 못하겠는가.

 

  그 가능성의 ‘맛’을 조금 보았던 1년이라고 해도 괜찮을 법한 시간들이었다. 이 시간들에, 이 만남들에, 이 인연들에 감사의 마음을 보내며 한해를 갈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