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가운데 산을 오르다.

-온배움과정 가을 산행을 마치고-

신성우

 

  “첫째날은 매우 화창한 날씨였다. 몸과 마음은 아직 무겁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이었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오후에 예상 일정보다 조금 여유가 생겨 매요리의 휴게소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시간도 가졌다. 오후가 될수록 장비와 식량이 가득 든 배낭의 무게가 조금씩 어깨를 내리 눌러왔다.”

-가을-

 

  온배움과정 가을학기는 첫머리로 백두대간 산행을 잡았다. 학기의 시작과, 과정, 끝이 리듬감이 좀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안했다. 또한 자기 돌아보기 시간을 농축적으로 가져 지나온 시간에 발목 잡히는 것이 있으면 훌훌 털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으면 무얼까 정리도 하면 좋겠다 싶었다. 늘 현재에 살면서도 마음과 생각은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로 앞서 가 있기가 일쑤다. 이것을 떨쳐버려야 ‘지금, 여기’에 머물고 집중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도 행복하고 과거로부터도 자유로워지며 미래를 보장받을 수도 있는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이다.

  온배움과정에 가을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이미 결정난 것이고 그것에 대한 평가는 나중의 일이다. 혼자서 가능하겠는가? 라는 현실적 문제가 있지만 이제는 온배움터가 나와 가을, 이 둘을 부양하고 키워낼 정도의 여력은 갖췄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계속 가보자고 했다. 오히려 혼자서라도 계속 이어가려고 한 가을의 판단과 결정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둘째날의 몸 상태는 짊어진 무게와 산행의 움직임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오히려 가벼운 느낌이었다. 길 가다 주운 나무지팡이를 많이 의지해서 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나타나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르내리는 사이에서 적당히 지친 몸과 마음이 오히려 첫날 걸으면서 들었던 잡다한 생각들을 지워주기 시작해서 좋았다. 그제서야 산행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리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끝없이 오르내리는 지.”

-가을-

 

  산행을 하면서 몇 가지 정리가 된 것이 있다면

  첫째, 산행이 참 편했다. 마음은 두 말 할 거 없고, 몸이 크게 부대끼지 않았다. 이제껏 나에게 산행이라면 고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목적지를 정하면 어떻게든 가야한다는 강박과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고 몸이 상하든 말든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산행이 힘들었고 몸도 힘들었다. 산에 접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돌이켜보니 지난날의 내 삶이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움켜잡고 달려갈 때도, 귀농이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갈 때도, 지역공동체다라고 규정하고 제자리걸음할 때도, 심지어 사랑이라는 욕망에 정착하려 할 때마저도. 그렇게 하다가 몸에 병이 왔다. 폐결핵을 앓고 1년 정도 요양하는 동안, 그리고 낫고 나서도 몇 년 정도는 산행을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렇게 힘들었으면서도 산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바탕에 흐르고 있었다. 비록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이번 산행은 마음으로 너무 편안하고 몸으로도 좋았다. 몸이 힘들긴 했지만 끌려가지는 않았고, 시작하고 끝나는 내내 호흡을 지켜보면서 그에 맞춰 보폭과 속도를 조절했다. 마음 또한 담담하고 편했다. 지금 내 일상이 바로 그러한 거 같다.

 

  둘째, 온배움과정 산행프로그램에 대한 정리. 시작 프로그램으로서는 괜찮은 거 같다. 다만 텐트에 취사도구, 옷가지, 물 등 부수적 준비물을 다 지고 가야하는 게 맞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출발지에서 간단한 점심과 간식거리, 물 정도만 챙기고 산행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 야영지에 텐트와 취사도구 등을 지원하러 오면 될 거 같다. 그러면 걷는데만 집중할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레 자기내면과 연결된다. 거리도 성삼재-백운산 정도는 3일이면 거뜬하게 걸어낼 수 있을 거 같다. 이 정도면 입문코스로서는 썩 괜찮다고 생각된다. 정토회의 만배 프로그램과 녹색연합 순례방법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리고 내가 오래동안 좋아했던 산행에 연결시켜본다.

  산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산에 안길 때 찾아오는 평화가 있다. 역시나 이것도 자기고집이 내려지고 정리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감정 상태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붙잡고 있던 것이 내려지면 혹은 스스로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거 같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살펴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온배움터에서 자기와 사회와 세상에 접하는 통로는 건축과 농사, 살림, 몸(자연의학), 그리고 생명철학을 통해서이다.

 

  셋째, 연찬에 대한 생각이었다. 불교근본교리에 관련된 책자를 갖고 가서 잠시 살펴보았는데, 철학적으로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한 통찰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라는 것은 세상이 부단없이 변해간다는 것이고, 변해가는 것은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변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바로 연기하는 세상에 대한 통찰이다. 이것에 대한 지식적 이해는 사실 별거 아닐 수 있다. 현대과학의 측면에서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상식에 속할 정도다. 그런데 스스로 몸에 체득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거 같다. 사람이 흔히들 괴롭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대개 뭔가를 갖고 싶은 것이 안 가져질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혹은 어리석은 행위를 할 때 발생을 하는 거 같다. 더 살펴보면 이것은 뭔가를 잡고 있을 때이다. 고정불변의 ‘내’가 있고, ‘내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고정불변의 ‘내’가 세상을 대상화하고 단절하고 절취하려고 한다. 이것이 잘 되면 좋아하고 기뻐하고 잘 안되면 성내고 괴로워한다. 잘 되든, 안되든 더욱 더 집착의 정도는 깊어간다. 이러한 반복은 세상이 연기한다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무지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연기하는데 고정된 ‘나’의 감각과 감정, 사고를 통해 단정하고 고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문제의 근본원인은 바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싯달타는 오랜 수행을 통해 직관적인 깨달음을 얻었다지만 우리로서는 그런 게 가능할까? 과학적 지식으로 이미 세상이 연관되어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이성으로는 이해하고도 왜 몸과 마음의 변화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측면에서 연찬운동이 하려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에 대해서, 감정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에 대해서. 등등.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사실은 어떤가? 정말은 어떤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스스로 탐구하고 검토해가는 과정 속에서 실은 내가 잘 모르고 있구나, 안다고 생각했던 근거가 참으로 불확실하고 미약하구나,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구나, 모두가 연관되어 변해가는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와 몸으로의 체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의, 감정의, 사고의 작용에 대한 이해를 연찬을 통해 찾아가 볼 수 있다.

  이걸 왜 하는가? 라면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삶으로 이끌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 창조적 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 뭔가의 장애에 걸려 계속 넘어지지만 그렇지만 그 장애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강력한 도구이자 안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남곡선생님이 왜 연찬을 인문운동이라고 이야기 하는지가 조금은 이해될 거 같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새로운 운동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물질적, 제도적 차원을 넘어서길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는 자연현상에 의해 주어지는 문제보다는 사회구조나 자아의식의 왜곡에 의해 고통 받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거 같다. 사회구조적 문제나 의식의 문제는 살펴보면 밑바탕에는 개별적 ‘자기’만 고집하고 그 잣대에 의한 옳고 그름을 폭력적으로 분별하는 의식이 깊게 깔려 있는 거 같다. 그런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자기’ -개인이건 집단이건, 진보이건 보수이건- 를 넘어선 진화된 의식이 등장해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적 이상에는 사회주의적 혁명 이후에 혹은 혁명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의식을 넘어선 사회적 의식이 획득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의식이 일부 혹은 잠시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적 이상과 신념에 의해 획득된 고귀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시기와 상황은 그 때 뿐이다. 지금은 붓다의 시대도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도 아닌 그야말로 ‘지금, 여기’의 시대이다. ‘지금, 여기’에 맞는 방법이 필요하다. 인간 인식 메커니즘에 대한 과학적 -고정이나 단정없이 사실은 어떤가? 하고 계속 검토하고 살펴가 본다는 의미에서- 사고를 통해 인간 인식과 의식에 대해 투명하게 살펴가는 과정 속에 새로운 의식이 출현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셋째날의 산행은 빗속에서 시작했다. 온종일 예정되어 있는 예보 때문에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빗 속의 산행이 낯선 나로서는 걱정이 되었다. 결국 팬티 속까지 다 젖어버리게 된 산 중의 비바람 속에서 그대로 몸을 내맡기자고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편해지고 비 내리는 경치들을 즐길 수 있었다.

빗방울에 씻겨진 나무와 들풀과 나물들은 선명하고 깨끗하게 모습을 드러내고서 발길을 재촉하는 나를 자꾸만 잡아챘다. 백운산 자락에서 친숙한 풀과 나물들을 마주하면서 힘든 오르막길을 가벼이 올라가는 힘을 얻었다. 안개와 비바람이 가득한 백운산 정상을 뒤로 하고 가파른 상연대 내리막길을 거쳐서 학교로 돌아왔다.“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