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안학교 사례 비교분석을 통한 대안 모색 >
                                                                양희창 (간디학교)


  지금의 교육상황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가 달라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거대한 공룡이 화석화된 것처럼 굳어버리고 타성화된 지 오래된 교육을 정상화하는 것은 무성한 말만큼이나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 ‘대안교육’을 해 보겠다고 90년대 후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여러 학교들은 기존의 틀을 고집하기 보다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니고 다양한 실험들을 해 왔다.
그러나 결코 학력사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분위기에서 느끼는 대학진학에 대한 부담감, 대안학교 교사들의 준비부족, 또는 애초부터 대안교육 바람을 타고 생겨났지만 전혀 대안적이지 못한 교육철학등으로 인해 대안교육 현장은 내적, 외적 정화요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학교가 변해야 한다고 하면서 생겨난 대안학교들의 상황이 외국에서는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 적지않은 도움을 줄 것 같다. 여기에서는 대안교육을 몇 년간 해 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느꼈던 부분, 즉 어떤 교육철학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 철학은 교육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녹아나고 있는지, 학교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새로운 학교’를 구상해 보고자 한다.


         대안교육은 공공성을 지니고 있는가?        -대안학교의 철학적 기반 -
대안교육은 공공성, 즉 공적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것은 교육이 지녀야 할 가치들을 담론화할 수 있는 교육철학을 만들어 내고 그 철학에 따라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는 ‘정체성’에 대한 지적이다. 대안학교들이 만약 뚜렷한 교육철학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미 대안학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셈이고, 교육의 본질적인 가치를 논할 수 없다는 점은 그 학교가 변질하거나 소멸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생겨난 외국의 대안학교들은 저마다 뚜렷한 교육철학을 갖고 태어났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은 시대를 넘어서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핵심적 가치로 이야기되는 것은 ‘자유’와 ‘공동체’로 단순,요약될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이러한 가치는 인류가 꾸준히 추구해 온 보편가치이며 우리모두의 영원한 화두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유’라는 교육철학은 대안학교 중에서 가장 알려져 있는 써머힐을 통하여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교장이었던 닐은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학교 전반에 내면화하였고 그 전통은 일본의 키노쿠니 학교나 미국의 프리스쿨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이들을 철저히 신뢰하고 개개인의 아이들이 정신건강이나 학습에 관한 한 어떤 규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이들에게서 욕망의 배출이 자유롭게 허용된다면 사랑과 창조로 나타날 수 있지만 억압된다면 파괴와 미움, 마음과 육신의 질병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보는 생각에서였다.
닐은 자신의 기존 생각에 대한 변화까지도 허용했으며, 자유를 침해하는 어떤 가치도 선행될 수 없다고 믿었다. 학생들이 교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학교안에서 공공연히 욕을 할 수 있으며 흡연자가 많지는 않지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 그리고 나체로 수영할 수 있다는 것등은 이 학교가 ‘자유’라는 가치를 통하여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을 과감히 허용하고 오히려 즐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직업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며, 불행한 의사가 되는 것보다 만족스러운 트럭 운전수가 되는 것이 의미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이 모든 인습과 미신과 위선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교육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명령에 따르기는 쉽다. 자기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 길을 걸어가면서 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사는 일, 그것이 이상이다.”라는 니일의 이상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리라,

키노쿠니 학교는 우리와 같은 입시체제, 학력사회 열풍을 겪고 있는 일본의 상황에서 동양적 써머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간다. 92년에 생겨난 키노쿠니는 어린시절부터 시험성적 일변도의 입시체제 때문에 놀이를 박탈당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아이들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자라도록 돕는 일이 교육의 목표이어야 한다고 철학을 분명히 하였다.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있는 아이는 대체 어떤 아이일까. 키노쿠니 학교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감정적으로 해방된 아이(감정의 자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태도와 능력(지성의 자유), 함께 사는 즐거움(자유로운 사회성)을 들고 있다. 세상의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결정하며 이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한 것이다.

써머힐이나 키노쿠니가 ‘자유’를 핵심가치로 두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어 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조화를 위하여 다양성과 일치에 대한 치우침없는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안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이들 학교는 아무래도 개인의 자유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번 써머힐 교장(닐의 딸)을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는 써머힐에서는 역사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학교에서는 역사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때 느낀 것은 영국이라는 자유로운 사회풍토가 대안적 사회를 형성해 주기에 따로 역사교육이 필요없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펼치고자 하는 ‘자유와 공동체’라는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출신의 사티쉬 쿠마르가 세운 하트랜드 학교는 ‘생태성’을 바탕으로 한 평화운동을 통하여 또다른 공동체철학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티스 쿠마르는 간디와 함께 토지개혁운동에 참여했고 무일푼으로 걸어서 러시아와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까지 평화를 위한 순례를 감행했던 분이다.
그는 ‘학교를 만들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원칙에 근거한 조그만 학교를 하트랜드에 세우자’고 생각하고 서른 명 정도가 모여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가정의 연장으로서의 학교를 생각했고 가정의 중심인 부엌과 도서관이 학교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땅에 뿌리를 내린 교육, 즉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음식, 옷, 집을 위한 기본적인 배움을 교과과정의 기본으로 생각하였고 마을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마을학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가난의 자발적 선택과 자연이 우리의 가장 큰 스승이라는 생태적 발상에 따라 소박한 마을학교이기를 원했던 하트랜드 학교의 생태성, 평화주의 원칙은 환경이 파괴되고 국가간의 침략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대안교육의 또다른 인류적 공동체 가치를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본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미국을 지원하고 있는 영국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이라크 침공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전운동을 하거나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제는 자유라는 가치가 자신이 속한 국가나 사회에 머물지 않고 다른 세계와 생물들에게도 실현될 수 있는 핵심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더 넓은 공동체 철학이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교육자의 근본적인 자세가 되어야 할 세가지 황금률은 하나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교사 개개인의 존재 속에 깊이 스며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가지 황금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이 세상으로부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교육하며 인간의 속성인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발도로프 학교를 전 세계 50여 국가에 걸쳐 약 640여개를 세운 슈타이너의 말을 되새겨보게 된다.  

많은 대안학교들이 교사와 학생간의 친밀한 관계, 사랑으로 맺어진 공동체를 최상의 학교라고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런데 아이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마음껏 개성을 발전시켜 주면서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동시적 과제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한 곳으로 치우치거나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 철학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도대체 왜 대안인가에 대한 존재이유를 잃게 된다. 왜 학교를 세웠는지 그리고 어떤 시대적 목표를 지니고 있는지 고민해 볼 일이다.  


                 다양한 교육과정이 존재하는가?
미국의 공립 대안학교인 메츠 고등학교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수업과 시간표가 없다. 학생들은 분기마다 자신의 학습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한 학습 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한 학생의 학습 계획서에는 환경 과학 공부, 인턴 학습 , 방과후 활동, 토론 동아리, 학급 신문, 등의 과업이 있고 이에 따라 수리능력, 의사소통능력, 과학적 추론, 사회적 추론, 학습 자원등의 성취목표가 주어져 있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목이 허용되고, 많은 과목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학교가 한 공간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지역의 어느 곳에 가서도 배울 수 있는 인턴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학교란 학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학교이다라는 생각은 ‘시티 에즈 스쿨’이라는 학교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CAS(City As School)은 뉴욕이라는 도시 전체를 학교로 이용하고 있다. 창고같은 건물 하나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코스가 1984년에 278개나 된다. 영어, 사회, 수학 수업가운데 11개 코스는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고 나머지 대부분은 학교 밖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은 학교라기보다 뉴욕 시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학습 활동을 조정하는 ‘본부’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러한 ‘벽이 없는 학교’는 학교와 지역사회와의 울타리를 없애고, 지역사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교육자원을 아이들 교육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에 있는 모든 자원이 학교를 이루고 있는데 박물관, 잡지사, 병원, 식물원, 보육원, 극장, 레스토랑, 연극연구소, 인쇄소, 사진관, 헬스클럽, 재판소, 대학교등 모든 시설들이 활용되고 있다.

미국의 우파티나스 학교는 학생마다 교육 과정을 다르게 하고 있기 때문에 학년, 학점, 석차등을 매기지 않는다. 학생들이 일주일에 이틀만 학교를 가기도 하고 30년째 시행되고 있는 개인별 선택 교육과정을 따라 스스로 자유롭게 교육과정을 만들어 갈 수 있다. 학점제로 졸업하는 학생들의 성적은 서술형으로 평가되고 자신이 수강한 과목에서 배운 내용과 느낀 점을 상세히 쓰고, 지도교사와 동료 학생들도 수업태도나 학업 성취도에 대한 평가를 덧붙이게 된다.

우리나라의 대안학교들도 ‘자율과 선택’이라는 원칙에 따라 다양한 교과목과 체험활동들을 제시하고 있다. 알고 보면 제7차 교육과정의 교육 프로그램도 제도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선택권을 학생들에게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유명무실해진 것은 아이들의 의사에 상관없이 모든 선택수업들이 입시를 위한 보충수업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대안학교들도 이러한 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의식주 교과나 특성화 교과가 개설되어 있지만 지식교과 위주의 수업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과목의 선택보다는 1교시, 2교시의 정해진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대학을 보내기 위한 수업들로 인해 특성화교과가 충실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코 대안적이지 못한 사회에서 대안학교의 모습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앞으로의 교육과정은 외국의 거의 모든 대안학교들이 보여주는 자율과 선택의 원칙들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도쿄 수레’라는 일본의 학교를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도쿄 수레는 학교를 다니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학교를 만들고 그기에다가 ‘홈 수레’라는 특이한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홈 슈레란 홈 에듀케이션을 하는 가정들의 모임이다. 슈레란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그리스어이다.
공부는 학교에서 교과서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만 벗어나면 아이가 관심을 갖는 모든 것이 교과서가 되고,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할 때까지 기다려주면 된다는 교육철학으로 약 600여 가정이 홈 슈레에 등록하여 자유롭게 네트웍을 형성하여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의 붕괴와 왕따등의 문제가 심각할 즈음에 생겨난 홈스쿨의 경향은 새로운 학교 운동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일 년에 6,7만명의 청소년들이 학교를 이탈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앞으로의 학교형태를 예측해 볼 수 있게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교육과정을 살펴 볼때 다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개념이 ‘치유’라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학자들은 대안학교를 나눌 때 부적응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학교와 제도적 대안학교로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부적응 아이를 위한 교육에는 치유의 교육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며 부적응아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반문하게 한다.
모든 대안교육의 교육과정 속에는 잘못된 사회구조나 피폐한 가정으로 인하여 왜곡되고 상처입은 영혼들을 위한 기다림과 사랑의 치유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치유라는 개념이 매우 아이들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으나 긍정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행복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회복의 노력이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국의 무반덱 학교는 권위주의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육체계를 건설하려는 노력 가운데 부모한테서 버림받거나 학대받아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아이들을 위해 1979년에 세워졌다. 콰이강 언덕을 끼고 있는 넓은 농장에서 아이들은 긴장이 없는 부드러운 행동과 자연을 통하여 배운 한가함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상담 치료교육이니 전문 교육 없이도 스스로를 회복하고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반덱 아이들이 맨발로 살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며 밥을 먹을 때도 땅에 앉아서 강아지들과 함께 밥을 먹는 자연성을 통하여 감동과 경외감을 가졌다는 방문자들의 말처럼  자연이라는 위대한 스승의 치료과정을 우리는 얼마나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치료의 학교’라고 부르는 학교가 있다.
미국 뉴욕주에 있는 프리스쿨은 스스로를 치료의 학교라고 생각하는 데 이는 그 학교가 문제아들을 위한 학교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문제를 가져오는 것을 환영하며, 좋은 교사라면 한 인간의 정신의 내부에서 꿈틀대고 있는 문제점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우고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의 자유를 맘껏 누리게 한 다음 자기만의 개인적인 시련과 잘못에 근거를 둔 풍부한 상상과 가속력을 지닌 공부과정에 뛰어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은 삶의 과정이 되고 이웃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잘 살아갈 수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과정이 교육의 내용이 된다. 알코올 가정에서 학대받고 자란 아이가 있다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공부가 아니라 가정에서의 상처로부터 회복되는 것이며 자신을 인정하고 올바르게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바로 그 아이의 교육과정이 되는 것이다.

대안교육의 교육과정을 소개할 때 꼭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발도르프 교육에 대하여서는 나 자신이 아직 완전히 소화를 못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단지 발도르프 교육이 인간의 영성(sprit)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 예술로서의 교육과 삶을 연결짓고 있다는 피상적인 소개를 하는데 그쳐야 할 것 같다.
영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출생 이전의 나의 영이 어떻게 이 땅에 내려와서 삶을 살아가고 또 죽음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며 우주와 자연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발달과정을 살피며 이를 바탕으로 교과과정을 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육은 우주적 흐름에 거스르지 않게 나의 삶의 중심을 세우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이 학년이 되어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쳐준다. 일 학년은 문자를 가르치기보다 그림 속에 있는 문자를 ‘그리게’ 한다. 유치원에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 자신의 상상을 풍성하게 만들어 그 힘으로 세상을 만나게 한다. 저학년 아이들이 놀이와 손공예를 많이 하는 것도 ‘놀이 중심’에서 ‘일 중심’의 생활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하는 세상과 자신의 만남이 된다.          
키노쿠니 학교에서는 교사 중심보다 자기 결정을 중시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획일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존중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다양하게 학습을 한다. 교과서 중심이 아니라 행함으로써 배우는 체험학습이 중심이 된다.
이런 원칙에 따라 소그룹의 프로젝트가 마련되고 이에 따라 어린이들이 오두막을 만들고 탐험클럽을 조직하여 온갖 탐험을 즐기는 모습은 이러한 프로젝트 수업이 이미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우리로서는 솔직히 부끄럽고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참다운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비노바 바브의 말처럼 학습을 강요하기보다는 깨어난 상태에서 삶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는 생각을 대안교육에서 찾게 된다. 교육과정에서 모든 이들을 위한 대안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이들을 위한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어야 하며, 적응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함을 외국의 학교를 통하여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학교인가?
대안의 모습은 다양해야 하며 시대를 따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자기혁신의 모습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철학을 공고히 하면서도 우리가 처한 토착적 상황에 맞게 대안적인 모습을 갖추려고 아파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안교육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철학적 기반이 약할 뿐 아니라 교사들이 대안적인 교육과정을 소화해 낼 만큼 내공이 쌓여 있지도 못하다.
그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학력사회의 압력에 의해 ‘안 때리는 인문계 학교’ 정도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생태성이나 문화적 대안운동, 평화와 생명의 교육을 담보해 내기에는 역부족으로 어설프게 지식교육과 영성교육에 조금씩 양 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

좁은 문으로 가겠다는 진리에 대한 순종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결단과 창조성을 지니고 이 시대의 아이들이 모두 욕심과 열등감의 노예가 되어 불행해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함께 아파하겠다는 공공성과 대안성을 지녀야 한다. 즉 대안교육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대안교육은 아직도 1%를 위한 장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며 99%는 여전히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있다. 또한 대안교육의 공간속에 있는 1%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대안교육을 한답시고 우리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체 외국의 대안학교를 무조건 따라하거나 매 년 아이들이 수 백명씩 자살하고 기러기 아빠가 속출하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비역사적 행위가 될 수 있다.
대안교육은 제도교육에 대하여 파문을 던지며 학교교육의 대안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러한 모델링 작업과 아웃사이더 운동은 장차 모든 학교가 대안성을 지닌 학교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사이더 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틈새교육으로 자리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아이들의 현실을 바꾸는데 일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을 이렇게 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사례는 외국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는 보편적 운동이기에 충분히 제도교육으로서의 정착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측면에서의 모델링 작업이 필요하며 제도적 개혁을 가속화하는 견인장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학교’의 모습이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마치 급작스런 경제발전에 의해 젊은이의 가치관과 생활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바뀌었듯이 교육의 흐름도 급물살을 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새로운 학교에 대한 구상이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학교는 정형화되고 제도화된 모습을 훨씬 탈피하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처럼 수 십명의 학생과 몇 명의 교사만 있으면 학교로 인정되는 민교육 중심의 학교형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며 이미 우리나라도 그러한 실정을 반영하는 ‘대안교육법’이 머지 않아 제정될 것이다.

또한 교사가 매 교시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유롭게 교과를 선택하고 수업을 만들어가는 학교의 모습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교사는 이제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돕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움직이는 학교, 여행이 중심이 되는 지구학교, 홈스쿨을 하다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학교, 주말 중심의 학교등등 다양한 형태가 선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부유층 엘리트만을 위한 학교라든가 학력사회를 강화하기 위한 훈련중심의 학교도 못지 않게 성행할 것이다. 그만큼 기존의 획일적인 모습을 탈피하긴 하겠지만 학교형태에 있어서 철학적 혼란을 겪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대안학교의 정체성도 흔들릴 것이란 조심스런 예상을 해 본다.

이제는 대안학교들이 외국학교의 사례들을 공부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우리의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아이들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한 준비작업을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한다. 남북이 통일된 세상에서의 통일 청소년 학교를 구상, 준비한다든지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한 전문 치유학교라든가 아시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아시아 연대학교등 다양한 성격을 지닌 학교들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학교들이 공공성을 지니고 철학을 탄탄히 하여 초심을 잃지 않되 교육과정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안학교의 진정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안학교는 계속 만들어가는 학교이다.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이루고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가는 구도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하여 아파하며 문제 속에서 대안을 찾아나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대안성을 지녀야 한다. 그래서 대안학교는 늘 새로운 학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