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에게 죽음이 필요하다면?

 

‘뫼비우스의 띠’를 만드는 방법은 제법 간단하다. 종이 띠를 절반만큼 ‘비틀어’ 끝을 붙이면 된다. 재미있는 특징은 띠의 어느 지점에서 띠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반대면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을 띠를 따라 계속 나아가면 두바퀴를 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크레타 섬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 장이다. 라는 어느 크레타 섬 사람의 역설처럼, (그 모든이라는 말에 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거짓말 장이’라는 명제가 자기에게 되돌아 온 것. 같으면서도 다름이 진리가 되는 역설적 모순. 패러독스의 기하학적 표현인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고, 위와 아래가 없는 순환의 연속성, ‘영속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올해의 봄과 내년의 봄은 다르면서도 같다.

 

직선의 띠가 이 뫼비우스의 띠로서 순환성의 세계로의 발돋음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자기부정’의 ‘비틀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가 다르지만 같을 수 있는, 시간차원의 관계를 축적해가면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비틀어 자기부정과 같은 죽음을 맞닥드리고 났을 때다. 직선의 존재론적 삶이 순환론적으로 차원변화 하게 되는 것이다.

 

김용옥은 <아름다움과 추함>에서 자신의 기철학적 체계 내에서 인간의 ‘몸’을 토대로 느껴지는 감정(몸각적 기쁨과 슬픔)의 근원을 말한다.

 

“‘몸’이란 ‘기’라는 원질로서 설명되는 것인데, 기의 모임과 흩어짐(취산운동)과정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개방적 유기체적 단위이다. 나의 몸은 우주의 기의 취산운동의 단위이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고 시간성을 갖는다. 이 우주의 모든 경험의 과정이 내 몸안에 축약되어 있다. 몸은 우주 진화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문화 이전의 본래상태의 기억의 축적을 나의 몸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다. 이에 라오쯔는 유위에 대한 무위의 우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문화’란 놈이 인간을 규정하는데 있어 너무도 강력한 ‘현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모순, 인간의 고뇌는 해결될 수 없는 파라독시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문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큰 부담은 ‘당위’라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있는 그대로’를 만족하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가치’를 부담으로 얻었다. 내가 말하는 ‘기의 모순’의 가장 중요한 측면 하나가 바로 ‘그러한 것’과 ‘그러해야 할 것’과의 사이에 존속하는 거대한 괴리다. 인간의 웃음과 울음은 바로 ‘그러한 것’과 ‘그러해야 할 것’사이에 존재하는 갈등,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된 기의 양면성의 동시적 발견’이 기철학적 명제로 해석되는 인간의 웃음과 울음의 발생론적 근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이야 말로 그러한 것과 그러해야 할 것 사이의 모순에 충격을 받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사물이 전개되는 ‘스스로 그러한’대로 ‘그러한 것’으로 인정해 버리기 때문에 몸의 내면에서 어떠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적으로 인간이라는 동물도 오늘과 같이 웃고 울게된 분화된 감정의 역사는 일만년을 소급하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모순이 있다. 모순이 있는 곳에는 웃음이 없을 수 없다.”-키엘케고르

 

“탈춤의 본질은 탈을 쓰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과 탈을 쓰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양면성의 동시적 추구를 통하여 조명하는 인간존재자체의 갈등구조의 탐구다.”-김용옥

 

그러한 것과 그러해야 할 것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괴리, 이 갈등으로부터 그러나, 동양문명에서는 ‘모순된 기의 양면성을 동시적 발견’하지만 갑과 모순되는 을은 갑이 아닌 것이 아닌 그 무엇으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사유의 법칙에 의한 모순관계는 생성적 시간속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내재하고 있는 동양적 의식구조에서는 ‘모순이란, 화해가능하면서도 항상 대립적으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역동적 양극성의 극화현상이다.’ 라오쯔가 설명하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심미적 해결’로서, 모순과 화해(아름다움과 추함의 동시성)의 양면성의 공존.

이러한 두 모순된 기의 무위적이고, 생성론적인 균형이 동양문명안에서의 우월성(동양이 추구하는 ‘도’는 ‘미분화된 심미적 시공태’로 규정한다.)인 듯 글쓴이(김용옥)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동양문명권에서 살고 있는 ‘나’란 개인의 일상 안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축소시켜보자. 아름다움과 추함의 모순의 공존이 우리들 안에서 보편성을 갖을 수 있는가? 내 삶의 그러한 것과 그러해야 할 것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나는 화해되어 지고 있는가란 현실적 질문들.

나의 유전인자가 내재하고 있을 동양적 의식구조, 이에 반해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희랍문명으로부터의 이분법적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역사에 지배적 영향을 받아왔다.

이제부터라도 동양인의 우월한 전통적 의식구조로 돌아가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인간의 특성인 무리를 형성하여 ‘문명’을 탄생시킨” 우리는 기쁨과 슬픔으로 예민하게 분화된 ‘존재론적’(유위) 지금을 살아가며 ‘몸’(무위)과 괴리된 삶의 모순에 하루하루 비극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렇게 하여 나에게 비극은 탄생하였다.

유위(문화성)와 무위(자연성)의 모순된 삶의 양극단성의 혼돈.

우리에게 더 자연스러운 희랍문명식 의식은 자아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는 극단성을 내포하고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비극 ,영화 ‘블랙스완’.

앞서 던진 질문의 결론에 나는 극중 ‘발레리나 니나’(나탈리포트만)의 죽음을 두고 싶다.

이야기의 전말은 발레작품 ‘백조의 호수’의 내용과 일치한다.

 ‘마법에 걸려 자유롭지 못한 몸의 백조는 왕자의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왕자옆에는 백조의 쌍둥이 동생 흑조가 있게 되고, 백조는 왕자의 사랑을 맛보았지만 결국 그 꿈은 부숴지고 상처를 받는다.

백조의 생명력이 다해가고 흑조는 사랑을 훔쳤다. 백조는 버림받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뿐.

로스바르트를 내려다보고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그러나 죽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고 꿈의 결실을 맺는다.’

백조의 호수의 큰 특징은 순수한 백조와 욕정의 화신인 흑조를 한 사람의 발레리나가 연기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발레리나들에게 이 작품은 동경의 대상이자 난이도가 가장 높은 연기에의 도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백조와 흑조의 대립적 분열, 갈등, 백조와 흑조의 소외, 왕자와 백조의 소외, 흑조가 빼앗아 가버린 꿈,

백조가 빼앗겨 버렸다고 생각하는 꿈, 문명안에서 꾸고있는 꿈, 문명이 허락하는 한계선 안에서 꾸고있는 꿈,

문명 안에서 우리가 꾸는 꿈은 인위적 오류가 낳은 자식이다.

꿈을 맛본들 곧 부서져버리는 꿈, 꿈을 이루기 전까지 꿈을 맛보고 그 꿈이 부서지기 까지 그 짧은 정상으로부터의 소외.

 

나의 자연성이 그러하고 싶을 때, 나의 문화성이 그러해야 할 것으로 손바닥을 때리며 다그칠 때,

어느 날 나는 ‘단군의 신단수’를 떠올리고서 동네 나무에게 간 적이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소외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의 나에게 나무들은,

그들 안에 서있으니 (신기한 듯이) 나의 소외감 등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것을 그들도 느낄 수 있어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는 느낌.

자연 안에서는 ‘거대한 괴리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변화무쌍함과 평온함.

희랍식 의식구조에 길들여진 나에게 화해의 방식은

문화적 당위도 나의 자연성이 빚어낸 문명 안에서 허락되지 못한 백조의 꿈도 아닌

 자연과의 만남으로의 새로운 도피였다.

 

지금까지 백조가 살아온 땅, 로스바르트를 바라보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선택한 그녀의 죽음.

지구라는 우리가 태어난 것은, 어느 초신성 엄마별의 거대한 죽음이 있고나서 였던 것처럼.

인간의 살아있음의 역설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춤에서 호흡을 할 때에도 블랙홀의 죽음과 아기별의 생성과 같다.

숨을 빨아들이고 가슴안에 가득차게 되면 횡경막의 저끝까지 숨을 가득 메운 궁극의 끝에야

비로소 숨이 날숨으로 내쉬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갈등의 해소는 숨이 가득찬 저끝지점까지의 모순, 대립의 팽배 후에라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서 ‘뫼비우스의 띠’의 차원변화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든, 자연성의 그러한 것을 죽이든, 세상의 질타로부터 문화의 당위를 무릎쓰고도 그것을 죽이든,

그것들의 소멸을 의미하는 자기 부정의 뒤틀림이 필요했다.

갈등적 모순의 통합을 위해서는. 죽어서야 자유를 되찾은 백조의 꿈을 보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