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경향성과 틀 밖의 시각의 필요성

 

온배움터(녹대) 1기 시절 한면희 샘이 하셨던 강의를 듣던 중에 서양 철학 사상의 흐름을 배울 수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에 내가 품었던 의문중 하나는 무슨무슨 주의 하는 한 때의 사상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그 전까지 그 시대를 풍미했던 무슨 주의는 소멸되어버리거나 통폐합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든 생각하나는 그런 한 시대를 휩쓸고 가는 사상의 틀이 오히려 인간이 살아왔던 가치관의 소외와 정신적 범위를 답답하게 그 틀 안에서 옥죄고 있는 듯한 느낌이 짙었다. 민족과 민족, 그들안의 개개인마다 한 일생을 살다가는 개체적 시간의 차원들이 다 다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수원역 2층 난간에서, 만남의 광장을 내려다보며, 시작된 김종길샘의 수업은 그들이 현재 만들어 놓아 세상을 보이지 않게 지배하고 있는 사고방식과 논리, ‘경향성’에 대한 안내로부터 시작되었다.

   만남의 광장에는 사람들이 앉을 여러 방향으로 놓여진 의자들과 그 의자에 앉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단면이 보였다. ‘두 팔 앞으로 나란히’ 하듯 일렬로 줄을 세워 다닥다닥 붙여놓은 의자 한 무더기와,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있도록 가운데에 테이블을 놓고, 에둘러 의자들을 배치한 형태 한 무더기가 있었다.

   설계자가 의도를 갖고 배치한 그러한 의자들의 시스템에 의해 사람들의 움직임은 제한되고 영향을 받고 있었다. 독일의 전체주의 적인 군대건축 같은 방식의 한무더기 의자에서 사람들은 단상의 설교자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 보는 듯 획일적인 정면응시에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있었고, 에둘러 앉은 테이블 형태에서는 놓여진 의자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걸터앉기도 하며 마주본 사람들 간의 교류가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배치된 의자들처럼, 우리는 세상에 짜여져 있는 경향성과 그들의 논리에 의해 지배당한다. 그런 시스템 안에서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약속(규칙)같은 개념이 존재한다. 그러한 다수의 사회적 개념(통념)과 그것에 입각한 가치판단에 대중들은 함몰되어서 마치 그것이 절대적인 법인냥 채찍의 재단선으로 틀밖의 생각들을 잘라내어버린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악법과 같은, 그 시대의 다수적 경향성에 의해 예외적인 소수의 정신은 처형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사회적 합의, 시스템의 존중이었다.

   무질서의 혼란스러움으로부터 지켜줄 수있는 사회적인 시스템은 공공의 질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29 선언을 이끌어 내게된 87년의 6.10항쟁과 같은 사건은 이러한 악법과 같은 시스템, 틀의 변화를 바라는 대중 다수로부터 터져나온 혁명이었다. 틈새없이 견고하게 짜여져 있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이 악법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의 절대성이란 없다. 그것 안에서 자칫 소외되어진 진실들이 있을 수 있는 오류의 가능성을 우리는 사고를 열고 염두해둘 필요가 있다. 틀 밖에 나와서 나의 생각은 어떤지와 밖으로부터 틀 자체를 ‘관’하는 자세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다.

   이동식 수업의 다음 장소는 수원시 화성의 화홍문에 위치한 방화수류정이었다.

방화수류정이란 누각의 위치는

‘광교산의 한쪽 기슭이 남으로 뻗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서쪽으로 감돌아 몇 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으로 향하여 활짝 열린’ 곳에 있다.

   화성을 용틀임하는 한 마리의 용에 견주면 이 정자가 용의 머리부분에 불쑥 솟은 바위위에 위치한 것이다. 아자형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는 정교한 건물로서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는 이 정자는 그 당시에는 파격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이었다.

   축조과정을 보면, 용두에 솟은 바위, 즉 대지의 기운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한 복잡한 설계를 하게된 당시 정자 축조의 시스템에 파격을 준 예이다. 기존의 틀에는 맞지 않지만 현실에 맞게 재구성 할 수 있었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로부터 구현된 것이었다. 틀 밖으로부터 나와 바라 볼줄 아는 거리 유지로부터 비롯된 유연한 사고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개체적 개념정립의 시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일 것이다. 우리 각자는 내가 추구하고 있는 개념들, 나의 사고의 경향성을 고려해 봄 직 하다.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구조의 틀을 붕괴시킬 수 있을, 각 개체별 간의 정립된 개념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합의로서 틀을 바꿔나갈 수 있는 구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본론: 나의 개념, “그늘”

 

한국 미의식에서도 우리 민족적 고유의 미적개념정립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적 미의식을 규정하는 데 있어 국문학계에서는 서구적 미적 범주론을 활용하는 동향이 있었다. 미의식의 구조가 서양이나 동양이나 한국이나 다를 바없이 보편적이라는 전제하에 미적 범주들로써 ‘우아’ ‘숭고’ ‘비장’ ‘골계’를 제시했다. 그러나 서구적 미적 범주들을 우리 문화 및 예술에 체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있으나 그로써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적절하게 드러내 주기에는 미흡하다. 김수현의 <한국미의 범주체계론을 위하여>에서는 한국미학의 기초개념을 ‘멋/자연/풍류/해학/한/신명/씻김/흰그늘’ 이란 개념어로 제시해 놓았다.

   나 개인의 개체적 경향성이 만들어지는 부분은 여기서부터 일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이 ‘한’과 ‘흰그늘’ 이라는 상위개념 안에 포함되어있는 “그늘”이라는 미적개념이다. ‘한’은 서양미학에서의 ‘비장미’개념을 대신하는 민족적 미의식의 정서적 특징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즉 ‘한’은 단순한 기쁨과 슬픔의 감정처럼 일종의 미적상태이긴 하나 ‘흰그늘’과 같이 아직은 미의식으로 고도화 되기 전의 ‘정서적’상태를 말한다. 마음속에 쌓이고 쌓인 한을 삭일 때 그늘이 형성된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미적 개념중에 이 ‘그늘’이라는 말은 신라 향가시대 이후, 시나위판 전통음악, 판소리의 전문용어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소리꾼이 청중들 앞에서 소리를 할 때, 이때 귀명창 하나가 그 소리에 그늘이 없다라고 하면 그 소리꾼에게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기준점이 되어왔다. 예술에 그늘이 있으려면 ‘시김새’가 있어야 한다. 삭이는 것을 시김새라고 한다. 쌓이고 쌓인 한을 삭이는 것이다. 시김새가 있는 소리는 기교에 있어서 자유자재이다. 삭인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분노를 누르고 승화시킨다는 것, 예술적으로는 가슴의 한이나 쓰라림, 신산고초, 삶의 애처로움을 승화시키기 위해 피나는 수련과 독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되었을 때 참된 표현이 가능하다. 미적으로도 한을 삭이는 굉장한 노력을 해야만 미학적 성과가 나타난다. 윤리적으로도 그래야 사람이 성장한다. 삭인 흔적이 있는 예술, 눈물을 참고 억울한 것을 누르고 그러면서 정진하고 올바른 삶으로 가려고 하는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의 예술이나 인생에는 그늘이 드러난다.

   그늘은 융이 말한 ‘그림자’의 개념과 다르게 어둠이 아니다. 빛이면서 어둠이다.

‘그늘’의 사전적 의미에는 ‘볕이나 불빛이 가려진 곳’, ‘부모의 그늘처럼 어느 사람이 보살펴주는 아래’와 같은 뜻들이 있다. 한가지의 의미가 그 단어의 전부가 아닐 수있다는 관점에서 이 의미들을 수용해 보면, 그늘은 단순히 어두운 정서적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볕이 내리쬐고 있는데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어둡지만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도 그늘 뒤에 밝은 햇볕은 여전히 비춰주고 있으며 어두움과 공존하고 있다. 또, 밝음 뿐 아니라 뜨거운 고통의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을 마치 여름날의 땡볕을, 맨등으로 받아내며 자식을 지켜주는 부모님의 보살핌에서 그늘은 따뜻한 쉼의 모습이다. 그늘이라는 정서적 개념 안에는 어둠이면서 빛이고, 웃음이면서 눈물이고, 한숨과 탄식이면서 환호와 웃음이 들어있다. 이것과 저것으로 이분법화 되어있지 않고 공존해 있는 상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암수가 교묘히 섞여있는 심상을 떠오르게 해준다. 천상의 체험이면서 지상의 세속적 삶이고 이승이면서 저승이다. 이런 것들을 아우른 것이 그늘이다. 예술가에게 그늘은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빛과 어둠등이 역설적으로 대립되면서 공존하는 영역이면서, 더 확대해서 그 사람의 작품과 삶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분리되지 않은 통일적 관계에 도달하는 것이 그늘이다. 현실과 환상, 이승과 저승, 주관과 객관, 주체와 타자, 두뇌와 신체, 이런 대립되는 것을 연관시켜 하나로 일치시키는 미적인 창조능력을 그늘이라고 한다.   짧은 시 하나를 소개한다.

 

-결론: 그늘과 바램

 

낫을 가져다 네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네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차린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허수경의 시, <시>를 보면 눈물이 난다. 비린 생피가 스며들 듯 허리가 찍힌 일상속에 널부러진 고통스러움들을 그녀는 고통을 타자로 보고 저승으로 보고 싸워 무찔러야 할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피하지 않았다. 삶의 애환 앞에 두려운 듯 웅숭그리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말한다. 날이 선 낫에 네 허리를 갖다 대라고. 낫으로 찍히고 또 찍히는 다가올 고통들이 즐비한 숱한 일상들 안에서 나는 밥을 해먹고 아침, 저녁, 식구들 밥상을 차리며 산다. 노을처럼 모르는 사이 밤길 도둑이 들 듯, 음흉하게 스며드는 생피가 흐르는 고통들이 내 전부를 붉게 숨막히도록 덮쳐올 수 있지만, 또 한번 죽음과 같은 내 허리를 찍고 나서도, 물 먹고 드러눕는 일상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 그녀의 시를 보고 난 나는 눈물과 웃음이 흘렸다.

   그늘이 진 그녀의 시가 이렇게 감동을 주며 끌어안아 준 것은 무엇이냐? 누구누구의 아픈 마음이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라는 ‘오심 즉 여심’의 일치로부터 만들어지는 공동의 영역이 만들어 진다. 주체와 객체간의 공공성. 아파본 나도 불쌍하고 나처럼 아픈 당신의 마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무거운 마음에 그늘이 지지만 다른 사람의 그늘 또한 거부하지 않고 끌어 안고 갈 수 있는 마음, 이 마음은 바로 “수의천하”, 바로 아픈 마음이다. 중생이 병들었을 때 아파하는, 그 아파하는 것을 고쳐주려고 하는 근본적인 슬픈 마음이 없으면 사랑도 생기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알고 창작하는 것이 예술가로서 내면의 완성인 것 같다. 나의 삶의 한 부분도 이런 아름다움을 닮아 갈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그의 아픔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연희자가 되어 내 속의 것을 그들 앞에 천진한 듯이 풀어내 보일 때, 그 순간의 절정만큼은, 나의 진실과 그의 진실이 만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