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와 기독교적 가치관을 버무린 것, 철저하게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발상 때문에 단테의 신곡을 서양의 작품으로만 생각하였다.  
책의 쪽수도 넘어가지 않고 ‘지옥 편’을 계속 맴돌면서 읽는 것 자체가 고욕이었다. 등장인물에 단테는 자신만 아는 인물들을 나열하였다.
우연잖게 죽마고우인 황광우의 형인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으로 있는 황지우 시인의 글을 접하면서 이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몇 번의 시도끝에 다시 통독할 기회를 친구의 형으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나를 거쳐서 고통스런 마을로 가고
나를 거쳐서 영원한 고통 속으로 가며
나를 거쳐서 저주 받은 무리 속으로 간다.

지우 형님은  ‘나’를 지옥으로 보지 않고, ‘지금-여기’의 나, 그러니까 현실을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나 자신을 거쳐 지옥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순간, 나는 뒤통수를 사정없이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질 않았던가! 지옥은 죽어서 가는 어딘가가 아니었던 거다. 천국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살아가는 현실 자체다. 나를 거쳐 지옥을 가듯, 나를 거쳐 천국을 가는 것이다. 단테가 그렇게도 동시대인들을 많이 동원한 것 역시 현실의 지옥과 천국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신곡은 지옥같은 현실을 직시하여 천상을 오르는 영혼의 순례기이다.
신곡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예수가 말한 ‘늘 깨어 있으라!’를 새삼 다지게 된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가 ‘누구나 다 들어봤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우스개 소리로 ‘읽을 때마다 고전하는 책’이라고들 한다. 신곡은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정도가 심하다.
중요한 것은 단테가 깨달아 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선,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이 나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대하는 것들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서 깨어있지 못하여 나도 모르게 지옥의 삶에 처박혀 버린 자신을 돌아보며 몸부림칠 때, 이 작품은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이 작품은 우리의 삶을, 일상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마주하게 해 준다. 신곡의 지옥 편을 인내를 갖고 뛰어 넘어야 그 책을 통독할 수 있게 된다. 단테가 기술한 지옥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네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가 표현하는 지옥의 모습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