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스토예프스키)

좋은 책은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가 다르다. 참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던져준다. 나는 가장 좋은 책 딱 한 권만 꼽으라면 어떤 주저함도 없이 이 책을 든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다짐을 주는 책이니까. 누군가와 대화 중 나는 이런 말도 했다.

“인류 문화유산 중 최고의 것을 꼽으라면, 나는 이 책을 들겠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 붙들고 고민해오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리고 있다. 그의 고민은 실로 방대한데, 그것은 인류가 수천 년 간 붙들고 씨름하던 문제들이기도 하다.

선과 악, 생과 사, 평화와 폭력, 자유와 구속, 평등과 차별, 신의 존재, 지상(대지)과 천상, 이기심(자기애)과 이타심(인류애), 민족과 인류, 이성과 광기, 인간의 분열성, 허무주의, 대지와 민중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선지 논술 시험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논술 시험을 대비해서라기보다는 진정 나와 이웃, 나아가 인류까지 생각하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 확신한다.

이 책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불과 이틀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다. 그 간단한 사건으로 1천페이지 가량씩이나 썼다. 그래서 줄거리만 보는 데 익숙한 친구들에게 이 책은 거의 악마가 빚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생소하면서 긴 이름들은 누가 누군지 구별조차 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고통을 감내할 각오가 되지 않고선 소화는커녕 씹기조차 힘들 거다.

그러나 각 인물들을 마치 ‘나’이기나 한 것처럼 파고들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 번은 아버지인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돼보라. 그러면 선과 악, 이성과 광기가 뒤엉킨 그에게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 때로는 드미뜨리가, 때로는 이반이, 때로는 알료샤가 돼보는 것도 참 좋다. 그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열정, 냉철하고 차가운 이성, 숭고하고 신성하기까지 한 순결 따위가 내 속에 무한대로 뒤엉켜 있음을 발견하고 느낄 것이다. 그럴라치면, 내 속의 무한한 것이, 그래서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들 ‘까라마조프들’이야말로 곧 나 자신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 나오는 ‘까라마조프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한한 관계를 통해 무한히 변화하는’ 사람과 대지의 다른 이름이다.

이 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온갖 뒤엉킨 것, 혼란스러운 고민들이 조시마 장로의 기나긴 유언과 알료샤의 깨달음, 이윽고 눈물로 대지와 입맞추는 알료샤로 일단락된다. 이걸로 독자들은 뭔가 해결책을 얻은 듯하다. ‘대지와 천상, 선과 악, 생과 사, 이성과 광기, 이 모든 것이 바로 대지의 이치였음’을 얻는다는 거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면 너무 단순하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알료샤가 나아간 대지는 또다른 것을 품고 있다.

도대체가 대지는 고상한 의문과 고귀한 깨달음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이제 우리는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로 눈길이 닿는다. 일류샤의 죽음, 그 아버지 스네기료프 대위, 만인의 연인, 즉 창녀인 그루센까, 대지와 신의 결합물인 기묘한 악마 스메르자꼬프…. 대지는 이들 수많은 이질성을 품고 있다. 이들은, 고상하기까지 한 유한 계급 까라마조프 가문과는 달리, 대지 자체다. 까라마조프가 대지를 대상화하여 고뇌하고 대답을 추구한다면, 이들은 대지 자체를 산다. 이 살아있는 대지가 곧 이 책 전체가 던지는 의문이요, 해답이다.

이윽고 대지 전체가 다가올 때, 그것이 바로 내 삶 자체란 걸 느낄 때, 이 책은 두고두고 읽을 만한, 내 생과 이웃과 세계를 싸안는 거대한 피라밋처럼 느껴질 것이다. 모쪼록 이런 발견의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