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에서 본 상공성, 농성, 생태농성

1. 농업에서의 상공성
   <경작>에서부터 상공성은 이미 시작되었다. 토지개량의 한 형태로 나타난 경지정리는 평야가 있는 농촌마을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바둑판 모양이다. 보다 농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수확을 늘리기 위하여 일정한 구역의 경지 소유자가 공동으로 농지를 반듯하고 널찍하게 고치고, 배수와 관개에 따른 모든 설비를 개량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농업에 나타는 상공성의 기초적인 틀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구>, 즉 기계의 사용은 농업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땅을 고르는 트렉터나 경운기, 파종기에 사용되는 이양기, 농약을 살포할 때 쓰는 SS기, 논둑의 잡초를 제거하는 에취기, 벼 수확할 때 콤바인등은 기계화된 농업에서는 익숙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시간절약과 편리를 가져오지만 과거에 인간이 경작할 수 있을만큼의 농토를 필요로 했던것을 대량생산으로 산지를 개발하고 바다를 매움으로써 수익증대를 위해 더 많은 무분별한 자연환경의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농약과 비료살포> 과거에는 인간의 분뇨가 자연의 다시 되돌아가 퇴비로 활용했던 것이 화학비료로 대체되어 있다. 이것은 농한기가 지나 봄이 시작되면서 비옥한 땅을 위해 살포대는 준비단계이면서 또한 작물의 생장을 촉진시켜주는 시스템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어느 것이 네 자신에게 좋으냐고 묻지 않는다. 다만 얼마만큼의 수확량을 줄거냐고 묻는다. 그것이 화학비료살포 속에 숨겨진 뜻이다.
   단종의 식물을 재배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잡초이다. 잡초는 수확을 해서 거둬들이는 농부에게는 하나의 일거리로 존재한다. 원하는 수확내용에서 그 잡초를 걸러내야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잡초가 무성함으로써 인간이 원하는 식물에게 치명적으로 존재한다. 토양이 주는 좋은 성분을 잡초가 나눔으로써 인간이 원하는 품종의 식물의 생장은 저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약살포가 시작되었다. 단종식물이 가지런하게 바둑판 모양의 농지에 가득 차있고, 그 식물의 생장에 유해를 끼지는 모든 잡초와 벌레들은 없애는 것이다. 자연은 아직까지는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와 약물투여 속에서도 풍성한 가을을 주며 버티고 있지만 그 한계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품종의 개발> 우리가 흔히 듣는 슈퍼옥수수같이 생산증대와 수익증대에 우수한 많은 품종들이 개발되고 있고 봄이 되면 농부에게 보급되어 왔다. 올해 우리집에서 선택한 품종은 맛과 질이 좋고 많은 수확량을 내는 <동진 1호>라는 볍씨이다. 동진 1호는 많은 수확량을 보증한다. 예를 들어 벼 한 포기에 있는 벼 모개의 개수는 최대 290개의 낱알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득 열매가 많이 맺힌 유실수는 자신의 삶이 위태로울 때 종족번식을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친환경농업과 유기농농업> 올해 내가 살고 있는 금정면에서는 군에서 추진하는 <친환경농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농업이 살아남기 위한 대안이면서 금정면에서 생산되는 작물들에 대한 브랜드구축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논에 갈때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친환경농업단지라는 푯말이 길에 큼직하게 쓰여져  있다.
    웰빙이 붐을 이루고 난 후 사람들은 먹는 것에 관해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연과 친해져 있는 유해성이 덜한 채소나 과일이나 곡식을 선호하고 값이 비싸도 건강과 몸을 위해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소비자가 원하면 생산자가 부흥해야 하는 것이 상업의 기본적 시스템이다. 친환경농업과 유기농농업 역시 이 시스템 속에 속해 있다. 단지 소비자를 현혹하기 위해 브랜드화를 시킨 것이다.
   <친환경농업과 유기농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의 감소나 배제는 가져오지만 단종식물의 군집이나 대량생산을 위해 대체되는 친환경비료나 약품역시 완전하게 검증되지 못하고 단지 사람이 먹고 있는 것이니까 유해하지 않다는 성립 하에 제조되고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업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삶이 필요로 한 의식주의 틀을 벗어나 더 많은 수확량을 기대했을 때부터 이미 상공성이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인 본인이 경작의 시스템에서 본 상공성이다.


2. 농업에서 본 농성
   농부의 노동을 농성으로 보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쉼없는 농부의 노동은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그것이 농부에게는 당연한 일이며, 심지 않으면 거둬들이 열매가 없으니 늘 봄이되면 파종이 시작되고, 여름이면 생육단계로서 농부의 보살핌이 필요하고, 가을이면 추수의 단계로서 농부의 추수가 시작된다. 이것은 수천년이 바뀌어도 농업에서는 변하지 않을 시스템이다. 특별한 의식없이 시기에 맞춰 거름을 뿌리고 약을 살포하는 것 역시 모든 농부들의 의식 속에 당연히 해야할 통과의례처럼 농업의 경작방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공성의 대량생산이나 수익증대와는 다른 이면으로 볼 수 있다.
    농부는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노동을 한다. 일하지 않으면 거둬들이 생산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농부의 의식은 현대 농부들이 모두 갖고 있는 만성의 병 관절렴, 신경통등의 질환에 노출되는 근원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농부는 지금도 농터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일상임과 동시에 < 해야하는 일>이라는 인식의 농성이라고 나는 보았다.
   또한 다른 예로, 5일마다 열리는 시골장터에 가면 농성이면서 상공성인 품목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은 주름진 노인의 광주리에 놓여져 있는 산나물들이다. 고사리, 취, 모귀대등 자연에서의 인간의 채취는 순수 자연이 주는 양식으로써 오랜전부터 먹을 수 있는 식물로 자리매김해 온 것이다. 약초꾼이나 야생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순수자연을 속에서 그 모든 자연의 기본시스템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그 부산물들을 얻는다. 그것은 전통적인 흐름이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서 왔던 야생의 이 맛과 행복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극대화 되어 무분별하게 자연의 착취로 돌아온다면 상공성이 되는 것이다.
   이른 봄 농업이 시작되기 전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옆구리에 바구니 끼고 산이나 들로 간다. 산에서 얻는 자연 그대로의 식물과 들에서 얻는 쑥, 달래, 냉이, 씀바귀등을 채취하기 위해서이다. 이것들은 봄이면 있는 일상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 또 그 자리에는 그 누군가가 심어 놓은 일이 없었지만 어김없어 풍성한 자연의 선물이 자라나고 있다. 이것이 농성이 아닐까 싶다.
   다른 예로, <텃밭>이 최근에는 각광을 받고 있다. 도시에서는 작은 화분 안에 씨앗을 뿌려 상추나 고추등을 재배해서 먹기도 한다. 우리집에도 집 뒤안에 있는 텃밭에 상추, 쑥갓, 토마토, 가지, 오이, 호박, 감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더덕등 다양한 품종들이 자라고 있다. 그곳은 자연의 무풍지대같다. 농약이나 화학비료살포도 없으며 대량생산을 얻기 위해 농부가 안간힘을 쓰지도 않는다. 단지 씨앗을 뿌릴뿐 자연이 주는데로 그 곳에서는 얻는다.
   <텃밭, 친환경경, 유기농 농업>의 그 깊숙한 취지 안에는 자연과 인간의 동등한 관계를 부여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배설물이 다시 자연에게 돌아가 거름이 되고,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는 유해성의 약품들 속에서 자연의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


3.농업에서 본 생태농성
   향약, 두레, 계, 품앗이 같이 농업에는 서로 도우면서 경작하는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나, 바로 엊그제 품앗이를 가셨던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다. 지친모습으로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신 어머니께 물었다. “힘든데 왜 그 일을 가셨어요?”라고 묻자 어머니는 “ 다 늙은 노인들도 하는 일을 젊은 사람이 아프다고 못하면 쓰겠느냐”하시며 그 날 저녁 내내 끙끙 앓으셨다. 그 일이라는 것이 기계가 미처 살피지 못하고 빠트리고 간 곳에 모를 심는 일이었다. 농부들은 허리굽혀 모를 심는다. 그 자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눈을 맞추고 있는 모습으로 상상될 수 있다. 이것이 생태농성이 아닐까 싶다.
   농부들은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다. 이른 아침 농부들은 논을 살피고, 곡식들이 잘자라기를 기원하며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듯이 추수하는 그날까지 눈을 떼지 않고 곡식들을 돌본다.
   또한 농부들은 나눌 줄 안다. 곡식을 탈곡하고 나면 남은 벼이삭은 다른 사람들과 먹이를 구하는 새들에게 남겨둔다. 악착같이 한 알의 낱알도 주워야지 하는 농부는 없다. 같은 예로 유실수에 꼭 서너 개의 열매를 남겨놓은 것도 새들에게 주는 먹이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까치밥이라고 부른다.
   농한기가 시작되면 농촌의 부인들의 마실이 시작된다. 따끈한 감자나 고구마를 쪄서 함게 나누는 풍경은 농업을 하고 있는 촌락에서 이뤄지는 이웃간의 정이다. 나는 이것 역시 생태농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추석=서양의 추수감사절>역시 하나의 생태농성으로 보았다. 추수를 하고 차례를 지내는 것, 자연에서 얻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의 제의식 역시 생태농성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호지 여사의『오래된 미래』의 라다크의 전통적인 삶 속에서 생태농성을 보았다. 자급자족하면서 꼭 필요만 만큼을 자연에서 얻으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가는 사람들, 자연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 자연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 갈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의 삶자체가 가장 이상적인 동학의 이천식천의 삶이 녹아 있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