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상공성적 사유
중학교 2학년인 큰아들 태영이가 학교에 갔다 오더니 다른 날과는 표정이 다르다.
드릴 말씀이 있다더니 내일 학교에 엄마 오셔야 한다며 금새 눈물이 글썽거린다.
얘기를 들어보니,
한 반에 40명인 친구 중에 두 명씩 장애우가 있는데 태영이가 그 장애우의 도우미를 맡았단다. 어느 날 두 장애우끼리 싸움이 났는데 곁에 있던 반 아이들이 하나 둘 씩 이렇게 싸워라 아니다 저렇게 싸워라 때리면서 거들어 주었고 그래서 나중엔 두 장애우의 싸움이 격렬한 몸싸움으로까지 이어져 결국엔 선생님께 알려지고 장애우의 학부모까지 알게 되었단다. 싸울 때 곁에서 방관하듯 쳐다만 보고 있던 태영이까지 열 명의 아이들이 선생님께 불려가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아침 9시까지 학교에 가보니 나까지 포함해 열 명의 엄마들이 모여 선생님께 사건에 관해서 듣고 다음엔 피해를 당한 장애우 엄마가 말씀하셨다.
열 명이서 돌아가듯 한 대씩만 때렸어도 이건 왕따고 집단폭력이다.
멀쩡하지도 똑같지도 않은 장애인에게 그렇게 한 행동은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짓이다. 무서워서 학교도 못 간다고 해서 이틀씩이나 집에 있는데 우리 아들이 끝내 학교에 못 나오면 그 애들까지 가만 안두겠다.
집에 가면 애들에게 야단을 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속을 시키라며 지금까지 학교에 보내면서 얼마나 힘들게 견뎌왔는데 겨우 적응한다고 생각했는데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 도와주고 이해하는 게 도덕 공부가 아니냐며
학생들이 못됐다고 커서 뭐가될지 모르겠다며 격한 감정을 털어 놓으셨다.
열 명의 아이들까지 다시 불려와 야단 듣고 죄송하다고 그 어머님께 인사드리고서 학교를 나왔다. 엄마들끼리도 처음 대면이었는데 그 장애인 엄마만 빠지고 나머지 엄마들이 걸어 나오면서 하나 둘 씩 하는 말,
아니 왜 장애인을 같은 학교에 보내는거야
따로 특수학교로 보냈어야지, 그런 애들 때문에 우리 아들도 피해를 보는 거 아니냐며 괜히 그 장애인 때문에 우리 아들만 선생님께 혼난다며 말들이 모아졌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생각이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다들 당연하게 내 자식만 생각하는 엄마들을 보며 그렇게 친구들에게 피해를 당한 아이의 상처와 그 자식의 상처를 보며 통곡할 엄마의 심정은 왜 생각해주지 않는지,
내 자식이 소중하면 당연히 남의 자식도 똑같이 소중하다는 걸 외면하는 것 같다.
지금의 이 사건이 마지막이 아니라 아이들이 커 나가면서 끝없이 또 다른 사건들과 부딪치게 될텐데 언제까지 내 아이만 특별하게 보호막 안에서 살 수는 없을텐데
장애인이나 다른 친구나 사람끼리의 관계는 똑같다고 생각한다.
몸은 정상일지라도 마음이 장애인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너무나 편 가르기를 한다. 생김새가 다르듯 사람이 사람끼리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위해서 배려해 줄 수 있다면,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우리들 관계는 나만 우리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은 사라질 수 있을텐데, 나와 너 다른 사람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나눌 수 있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을 때 서로가 한마음 공동체가 될 때 정말 잘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내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된다면 다른 아이쯤은 상관없다는 적으로 여기는 그런 마음이 결국엔 돌고 돌아 우리 아이에게 화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은 잘난 한 사람만이 살아갈 수는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존중과 배려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면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따뜻할 것이다.

농성적 사유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아들하나, 딸하나, 넉넉한 살림살이까지 참 많이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친구였다.
자상한 남편의 배려로 공부도 더 하고 직장까지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아이들도 이젠 커버려 어느새 아이들만의 시간을 만들어 가고 남편은 승진하는데 왜 나는 회사에서도 그저 그렇고 오히려 남편의 승진이 자신을 우울하게 만든단다.
처음엔 행복한 투정처럼 넘기려했는데 상담까지 받고 약도 먹는다는 친구의 말은 심각했다.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에 매달려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를 보면서 행복의 기준이 뭔지...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태적 사유
며칠 연휴가 있어 친정엄마 생신이라 두 아이들과 같이 시골에 갔다.
내려갈 때 마음은 자주 못가는 시골이니 오랜만에 엄마한테 효도해야지 싶었다.
1남6녀의 우리 친정엄마는 맞벌이 하는 막내 남동생과 같이 사시면서 5살 2살 손주를 키워 주신다. 허리도 잘 못 펴시면서도 손주 키우다 시간이 나면 텃밭까지 가꾸어 곁에 사는 딸네 집에 상추라도 나눠 주시려 잠시도 쉴 틈이 없으시다.
오랜만에 넷째 딸이 내려왔다며 엄마는 그새 내가 좋아하는 나물에 찌개까지 끓여 놓으시며 그저 많이 먹으라며 챙겨 주신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 동생네 아이들까지 모이니 유치원이 따로 없다.
중3부터 2살까지 손주들만 열 명이다.
이래저래 끼니 챙겨 먹는데도 하루가 금방 가버린다.
난 효도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며칠이 가버렸다.
올라오면서 우리 아이들이 하는 말,
“엄마는 왜 할머니 생신이라며 할머니랑은 안 놀고 밥도 할머니가 해주시던데요”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일찍 돌아가신 아빠를 대신해 그 식당일로 고생을 하셨고, 이제는 쉬셔야 할 때에 손주 키우시느라 힘드실텐데 오히려 그 많은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챙겨 주시려하신다.
새삼 우리 아이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는 우리 엄마는 그렇게 자식들에게 주시기만 하시는 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었나보다.
말뿐이었었지 엄마에게 드릴 수 있는 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받는 게 당연한 것처럼,
자식들을 위해 당신을 희생하시면서도 그 희생이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나도 힘든지도 서운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시며 내 걱정은 말고 올라가면 자식 키우고 잘살아야 한다며 여전히 멀리 사는 딸 걱정만 하신다.
엄마의 희생적인 사랑은 끝이 없이 베풀기만 하신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기쁘게 자식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희생적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