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치열한 삶을 살으신 권술룡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영원한 청년으로 평생을 가난한 자와 더불어 현장에서 실천적인 삶을 살으셨다.

권술룡선생님은 허병섭샘과는 그 행동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었다.

허병섭샘은 함께하는 분들에게 그 어떤 지시도 지적도 하지 않고 스스로 느껴 말하게 하시는 반면에

권술룡선생님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남이 하기 싫은 소리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시는 현장을 중시하는 분이시다.

허병섭목사님보다는 1살위인 1940년 생이시다.

그 분이 2017년 작년에 영면하시었다.

한참 후에야 그 분의 소천을 전달받아 사실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한 결례를 하였다.

온배움터 녹색대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실제로 함양 온배움터에서 활동을 하시려는 의지도 갖고 계시었다.

그러나 여건들이 허락하지 않아 그 분에게 역할을 맡기지 못하여 지금도 아쉽게 생각한다.

제가 녹대대표로 있을 때 녹대의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몇가지 조언도 해 주시었다.

그러나 당시 녹대분위기에서 이를 수용할 수 없음을 이해하시고 다른 활동영역으로 자신의 현장활동의 방향을 전환하시었다.

선비적인 큰 어르신이 필요한 시점에 너무나 아쉬웠다.

청년기 때 함석헌옹의 천안 씨알농장에 참여하시었다.

그는 자신은 덕장으로서 역할보다는 실무자로서 조직체를

건전하게 운영하는 지장과 용장으로서 방향을 설정하시었다.

이상을 갖고 공동체로 뜻을 모아가고자 시작된 씨알농장이 온갖 이해관계자들의 사적인 이해로 인하여

철저히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재정립하였던 것이다.

실무자로서 활동가없는 ngo 등 오늘의 공동체 현실로서 그의 씨알농장에서의 향후 명확한 역할은

매우 타당한 것으로 필자로서는 평가를 내려볼 수 있다.

그는 사회복지법인 평화의 마을을 어느 영리조직체보다도 질서있으면서 그 취지에 맞게 운영의 틀을 제도로서 확립, 정착시키었다.

그는 그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스스로 결정하여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초 정년 헐씬 이전에 관장 등 시설장으로서

그 역할을 마무리하였다.

그의 아들을 사회복지법인에 입소한 여느 고아와 같이 그 어떤 배려나 특혜도 없이 함께 기숙,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 아들이 권술룡선생님을 한 때는 비정한 아버지로서 오해를 하였다는 일화는 그의 곱은 천성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그의 딸이 거동을 전혀 못하는 심한 중증장애가 있는 청년을 신랑을 맞이할 때도 그는 그의 딸의 선택을 존중하였다.

오늘 날 초기 그리스도교 정신 실종과 예수의 참 삶을 실천하지 않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교회 등을 세습하는 상황에서

그의 일상의 삶의 모습은 가난한 자들고 핍박받는 친구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행동 그대로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늙은 전사와 권총이란 별명으로 평생을 순례자처럼 이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세상의 인연에 사회적 책무를 다하시었던

권술룡선생님의 큰 뜻을 내가 발딛고 있는 현장에서 조금이나마 실천하고자 다짐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