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위한 예술, 커뮤니티 아트

 

김월식 | 작가, 계원예술대학

 

1. 다양한 세대(연령층)간에 맺어진 관계는 우리 사회에 어떠한 기능을 하나요? What is the role of intergenerational relationships?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세대 간의 친밀도가 높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유교적인 사고방식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존중심을 중요시 했고 또한 나이 어린 사람들의 예의와 범절이 공공의 도덕성을 측정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산업화 이후 급속도로 허물어졌습니다. 물론 다양한 이유가 존재 하겠지만 도시화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가족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세대 간의 관계와 친밀도를 허물고, 또 주거 문제의 해결 대책으로 만들어 놓은 아파트의 생활 방식들이 전통적으로 느린 삶을 살아온 세대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함과 부담감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미디어 역시 발 빠르게 성장한 탓에 미처 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이 미디어를 중심으로 소통하는데 있어서 차츰 소외 되는 양상을 만들기도 했고요. 어찌했던 지금 우리(한국사회)의 세대간, 혹은 계층 간을 연결하고 그 소통을 이루어 내려는 사회적 시도는 미비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 고질화된 세대 간의 단절감은 어떤 방식으로든 회복하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간의 소통과 교류를 위한 관계 맺기는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속도들의 가치를 환기 하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삶의 방식을 단편화 되고 전체화된 속도로 진행시키지 않고 다양한 삶의 속도를 통하여 과거와 현재 또 미래에 필요한 다양한 가치들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소수의 의견과 그 가치까지 사회적 자존감으로 만드는 그 첫 일들은 결국 세대의 다양한 차이를 나누는 일이겠지요

 

2. "무늬만커뮤니티"는 다양한 세대 간의 관계를 보다 자연스럽게 발생시키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나요? (물리적, 문화적 모든 측면에서) What support, spaces, etc. did SLC create to engage intergenerational relationships?

 

한국은 또한 ‘품앗이’라고 하는 커뮤니티의 좋은 전통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재능을 서로 나누는 방식인 ‘품앗이’는 노동력이 필요한 농경사회에서 많은 부분 커뮤니티가 필요한 노동력과 이를 통한 공동체 의식을 만드는데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늬만 커뮤니티’의 세대 간 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방식은 서로 필요한 재능을 나누는 데에서 시작 하였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어오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제도권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농사와 식물 키우기를 배우며 책과 교실 안에서 피상적으로 정보로만 다루던 문제들을 직접 체험을 통한 경험치로 만드는 기회를 만들었다고 할까요? 평생 목수 일을 하다가 지병으로 은퇴하신 할아버지에게 재활용가구를 직접 설계해서 만드는 일들을 배우고, 폐지를 수거하시며 살아가시는 할머니에게 재활용이 될 수 있는 쓰레기들의 분류법에 대해서 배우는 등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체득한 노하우들을 지역을 위해 나누어 쓰는 방식으로 세대 간의 만남을 주선 하였습니다. 사실 무늬만 커뮤니티는 자신의 사소한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플랫폼 이였습니다. 시간을 보내거나 잠깐의 휴식이 필요한 지역의 어른들과 놀이터가 필요한 지역의 아이들, 자신의 손으로 생활 사물들을 미적 또는 기능적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지역의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결국 서로의 목적을 다른 의미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플랫폼이었던 셈입니다.

 

3. "즉흥, 이기, 욕심, 쾌락"을 발견하는 것이 <관계>의 의미를 재정립하는데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What role did realizing feelings of “spontanaiety, selfishness, greed, and pleasure” play in redefining relationships (and community engaged pedagogy)

 

여기서 욕심과 이기심 쾌락은 무척 중요한 관계의 요소들입니다. 배려와 예의 친절한 마음들로만은 채워지지 않은 관계의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것은 자칫 희생이라는 착한 마음을 통해서 채워지는 만족감의 의미가 갖는 부족함을 보완하는 장치라고 할까요?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런 착함의 부담감을 덜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욕심을 만족시키면서 느끼는 성취감(쾌감), 공동체적 질서를 일탈해가면서 즐기는 공모자의 유대감, 예측할 수 없이 갑자기 찾아온(즉흥) 혼란과 당황스러움 들은 상황에 대한 커뮤니티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 콤플렉스들에 대하여 생각 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무늬만 커뮤니티의 관계성들은 개인의 희생을 통하여 얻어지는 공동체 연대감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한 커뮤니티의 관계성이었습니다. 다소 커뮤니티의 유대감이 떨어지더라도 느슨하게 잡고 있는 관계의 끈이 개인의 자율성에 기대어 성장하는 커뮤니티를 상상했던 것입니다.

 

4. "무늬만커뮤니티"가 재정립한 <관계>의 주요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러한 의미를 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은 누구에게 있었다고 보시요? (가령, 김월식 작가 및 작가팀, 동네 어르신들, 중년층 주민들, 청소년들, 어린이들 등) How was “relationship” redefined? Was it redefined by Wolsik’s team, elders, middle-age, teens, youth…etc.?

 

무늬만 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무늬만 (껍데기만, 혹은 가짜, 혹은 아니어도 그만인 등등) 커뮤니티여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커뮤니티 구성원 간의 관계의 주요한 의미는 ‘느슨함, 헛헛함, 어의 없음, 의미 없음’ 에 있습니다. 크게는 국가라는 커뮤니티에서부터 작게는 가족 간의 커뮤니티처럼 확고한 커뮤니티의 관계성들은 커뮤니티를 지탱하려는 의지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따라야 하는 불편함과 부담감은 항상 존재해 왔었지요. 그것이 권리와 의무라는 커뮤니티의 가치관을 만들었겠지요. 저 역시 한국의 근대를 관통하며 산업화와 함께 성장한 세대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원하지 않았던 군사교육을 받았고, 군대에 갔으며, 가족의 가난을 걱정하며 노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만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희생하며 살아온 한국의 개인들은 성장의 평가에서 늘 소외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그 정도 고생하고 열심히 살아온 개인들에게도 자신의 노력에 대한 가치들을 보상받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커뮤니티라는 이름보다 개인의 이름으로 개인의 욕망으로 꾸며지는 삶에 보조하는 커뮤니티의 역할, 공동체 의식에 우선하는 개인의 행복감들을 유지하는 ‘관계’를 생각했다면 너무 유토피아적 상상인가요? 무늬만 커뮤니티의 관계는 결국 구성원 개개인 모두가 주도적으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5. 왜 주민들에게 천천히, 그리고 쉽게 접근하는 방식을 택하였나요? What role did slow and easy approach have?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7개월이라는 한시적 시간이 주민들에게 절대로 천천히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음을 말씀드립니다. 사실 저에게 필요한 시간은 한 3년 정도, 사실 그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지역민들을 만난다는 것에는 자신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안 그런 척 해도 저의 조급했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역시 저 일 수밖에 없네요. 다만 예술가로써 기획자로써 무늬만 커뮤니티의 작가들과 스텝들에게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무늬만 커뮤니티의 철학과 의미에 대하여 매일 생각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성과주의에 집착하지 말자는 주문은 많이 했습니다. 억지스러움, 급함, 지나친 기대감등은 무늬만 커뮤니티가 커뮤니티로 성장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요소 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쉽게 접근했다는 말의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본래 그 지역의 지역민도 아니고 또한 친절함을 경계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지속적으로 만나서 자연스럽게 접촉면을 넓히고 경계심을 허무는 방식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었습니다.

 

6. "무늬만커뮤니티"의 프로젝트 안에서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의 하나로 "금연학교"를 꼽으셨는데, 그 밖의 다른 사례는 무엇이 있나요? 그렇게 보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What were more successful projects of SLC? Wolsik sited to non-smoking school, but what other projects…and why/how were they successful?

 

금연학교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단계에서 한 번도 예견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던 프로그램입니다. 말하자면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수 상황 이였던 셈이죠. 청소년들의 흡연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국가 정책도 지역민들도, 심지어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는 학교에서도 갈피를 못 잡는 부분입니다. 금연을 유도하고 가끔씩 흡연의 피해에 대해 교육을 해도 청소년들의 흡연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 청소년기부터 흡연을 해왔고 한번 흡연을 하면 금연을 한다는 사실이 보통 의지로는 쉽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플랫폼이 위치한 지역공간은 원래 청소년들이 야간에 모여 흡연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정확하게 데이터를 확보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저녁 몇 백 명의 학생들이 시간차를 두고 이곳에서 담배를 피운 듯 합니다. 그만큼 플랫폼이 위치한 장소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외지며 주변과 단절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혹 이곳을 지나는 지역민들도 이 곳 앞에서는 발걸음을 빨리하여 지나가는 말 그대로 지역의 음성화된 장소라고 할까요. 가로등도 켜 있지 않은 어두운 밤에 교복을 입은 학생 무리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가끔 만나는 지역민들은 이 불량스러워 보이는 청소년들의 모습 때문에 걱정 어린 말을 합니다. 사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청소년의 흡연이라기보다는 무리지어 모여서 나쁜 행동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기우겠지요. 청소년들은 무리지어 있을 때 그 연대감 속에서 죄책감들을 무마 시키는 듯 보입니다. 혼자서는 담배를 피우다가도 어른들이 지나가면 숨거나 담배를 버리는데 무리지어 있을 때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긋 힐긋 쳐다보면서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면서 흡연을 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 모습들에서 공포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문에 무늬만 커뮤니티의 작가들과 스텝들은 우선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본 모습들에 충실하게 이들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우연하게 그리고 즉흥적으로 시작된 이 만남은 청소년들에게 흡연을 나무라지 않고 금연을 유도하지 않으면서 지역민들이 이들에게 느끼는 반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청소년들 본인의 가족들이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는 곳 앞을 지나갔을 때 어떤 심정이 들겠는지? 아니면 이렇게 흡연을 하다 남은 꽁초와 쓰레기들은 누가 치워야 마땅한지 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 한 것 같습니다. 때문에 생각하게 된 것은 건전한 흡연 예절이었는데 한국적 맥락에 입각한 청소년 흡연의 정서에 대하여 솔직하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 스스로 어느 정도 자체 룰을 만들어 보는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의 흡연하는 모습을 비도덕적으로 생각하는 어른들과 직접 부딪치지 않도록 오랜 시간 그들은 플랫폼 안에서 흡연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 안전한 흡연실을 하나 제공한 셈이었지요. 그걸 과정은 그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서로에 대하여 경계심을 푸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주변의 골목이나 지하실 구석진 곳을 찾아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됐고( 하지만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모두 다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무늬만 커뮤니티와 관계를 만들지 않았던 또 다른 무리의 학생들은 여전히 지역의 곳곳에서 흡연을 하는 모습을 또한 우리는 종종 발견하였습니다) 무늬만 커뮤니티는 안전한 흡연을 위하여 플랫폼을 찾는 한 무리의 커뮤니티를 무늬만 커뮤니티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게 된 셈이었습니다. 사실 제도적으로는 비상식적인 이런 모임이 공식화 되었을 때 사회로부터 받아야 하는 질타와 후유증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실제 무늬만 커뮤니티 때문에 학생들이 더 흡연을 많이 하는 것 같다는 지역민들의 수근거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음성적인 행동을 같이 해 온 동료감으로 청소년들의 흡연 문제를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하는 사회적 시선들의 단선화 된 의식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였다고 할까요?

   하여간 우리는 많은 시간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이를 통하여 적어도 흡연한 만큼 지역의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을 수거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느슨하지만 우리의 약속들은 실행에 옮겨졌고 학생들은 수업이 없는 시간에 무늬만 커뮤니티의 스텝들과 함께 지역 곳곳의 흡연 장소를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였습니다. 실로 놀라울 만큼 많은 담배꽁초가 발견되었고 그들 스스로도 이렇게 많은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버린 주범들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에 놀란 듯 보였습니다. 때문에 한 때 지역의 담배꽁초가 조금 줄어드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예전 그대로입니다 ^^) 그들은 또한 작가들이 모여 있는 무늬만 커뮤니티와 우리의 활동에 무척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비교적 대학을 갖 졸업한 무늬만의 스텝들과 작가들은 결국 그들이 미래에 만날 그 들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령 차이가 많이 나지 않은 청소년들과 무늬만의 스텝들은 형 동생 누나 언니 하면서 금방 친해졌고, 그들은 무늬만 커뮤니티의 예술 활동, 특히 사진이나 영상작업을 흥미로워 했습니다. 이 호기심들은 그들이 소통하는 방식 외의 표현과 소통방식에 대한 의지로 표출되었으며 급기야 그들과 무늬만의 스텝들은 사진과 영상으로 그들의 이야기들을 직접 제작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여러 번 모여서 워크숍도 하고 자료들도 리서치 하면서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은 영상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론은 여기까지입니다. 오해와 부담으로 남은 이 프로젝트는 결국 영상을 제작하지 못하고 끝이 났습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지 때문이지요.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 만나고 서로에 대하여 흥미를 느꼈던 우리 모두의 관계들은 일방적으로 청소년들이 약속을 어기면서 점점 느슨해 졌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부담을 주었을까요? 하지만 무늬만의 공통된 목소리들은 억지로 그들과 이 틀어진 약속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수능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청소년들이 메달리는 시간과 압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학과 공부 외에 다른 일을 한다는 사실이 실제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이들은 시간을 초단위로 설계하며 빡빡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가끔 플랫폼 주변이나 길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여전히 반갑습니다. 그들은 무늬만의 작가들과 스텝들을 보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일종의 죄책감같은 것 때문에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늘 상 우리는 그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결국 우리는 ‘무니만 커뮤니티’ 이니까요. 당장 우리는 모두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하였어도(이 좋다는 의미도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했던 방식이 결코 아무렇지도 않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우리의 프로젝트가 7개월이라는 한시성이 없었다면 또한 우리는 다르게 무늬만 금연학교를 진행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기다리고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또 다는 의제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프로그램은 .....

무늬만 커뮤니티의 여러 프로그램은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평가방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성공적인 사례라는 것은 매우 상대적인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가시적이거나 개량적인 수치가 아닌 우리의 과정들에서 우리, 즉 무늬만커뮤니티의 한명이라도 또는 그 이상의 인원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일종의 성취감 자존감 혹은 좌절감이 발생되었더라도 그 부분은 지금 평가하고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닌 듯합니다.

 

7.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는 동안, 새로운 커뮤니티 결성 방식을 발견하셨습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Was a new model of community building realized? How would you describe it?

 

이 질문은 특히 어렵군요. 새로운 커뮤니티의 결성 방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커뮤니티 결성 방식 도 잘 모르니까요. 그냥 우리는 우리방식의 최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역의 콘텍스트에 맞게 사고하고 지역의 욕망과 의제와 건강하게 싸울 수 있는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조금 웃긴 이야기로 우리는 가끔 이런 농담을 합니다. 플래시몹처럼 쿨한 커뮤니티가 좋지 않을까? 단지 하나의 공통된 재미를 위해 한시적으로 모였다 즐겁게 놀고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쿨하게 돌아가는, 그리고 다음을 상상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너무 깊게 의식하지 않고 언젠가는 또 다시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모여 또 다른 일을 도모하고...

 

8. "자아"를 강조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그 효과가 연령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었다고 보시나요? What is the power of heightening self-esteem? How was that realized by different generations?

 

자아를 강조했나요? 우리가요?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모든 사람에게 자아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삶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요? 그것은 너무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실재 강조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연령에 따라 자아가 다르게 인식된다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아와 자존감이 흔들리기도 확고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연봉을 받고 대기업에 다니는 누가 보아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젊은 직장인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자아는 어떨까요? 표면적으로 보이는 나이와 사회적 위치, 사회적 잣대가 그 사람의 자아를 대변할 수는 없지요. 그에 비하면 조금 가난하고(사실 많이 가난합니다^^) 점점 많이 나이 먹어가는 예술가의 자아는 그 작가가 평생 새로운 가치에 대하여 도전하고 고민해온 사실이 진정이라면 그 에티튜트는 그 작가의 자아를 견고하게 하는 원동력 아니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자아’란 개인이 사회적 잣대에 대하여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전체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도, 전체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도 소수와 개인의 진정성 있는 믿음들이 곧 ‘자아’이겠지요. 그 자아는 70살이 넘어도 폐지를 주어가며 노모를 모시고 아내와 가족과 같이 정말 열심히 살고 계시는 김명철 할아버님에게는 쉽게 질문하지도 못하고 질문해서도 안 되는 자아 인 것 같습니다. 사실 무늬만커뮤니티에 오고 가시는 많은 시니어들은 평생 자신들의 자아에 따라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새삼 우리가 그들에게 사회적 자존감을 회복하자는 논리는 무척 천박하고 선정적인 제스처로 비추어 졌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자아는 예술가들이 그 분들을 통하여 획득하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 자아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9. 무늬만커뮤니티 안에서 관계미학이 가지는 역할을 무엇인가요? What roles did relational-aesthetics play in SLC?

 

우선 관계미학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계미학이 실천적 용어로써 자리잡은 씬(scene)을 규정하기가 저로써는 조금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니콜라스 부리오Nicolas Bourriaud 의 관계미학을 제 자신의 방식으로 독해해보면 결국 관계적(relational)예술이란 작가 자신이 탐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자신의 미적 취향을 위해 생산하는 작업조차도 사회에 관해 사회를 지향하고 또한 사회에 일정방식 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모든 예술은 관계미학적 측면을 포함한다고 보아지는데 이 질문에서 말하는 관계미학이란 결국 그것들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좀 더 적극적 방식의 사회적 간섭과 접촉, 상호작용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는 무늬만 커뮤니티가 지역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만드는 것에 주목했다기 보다는 만남의 실천적 행위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커뮤니티에 주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관계(미학)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만들거나 그 공동체의 철학과 함께하는데 동조했다기보다는 좀 더 개인적으로 관계(미학)가 예술의 구조 안에서 새로운 형식의 미디엄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규정할 수 없는 매체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실험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아트 세미나와 심포지엄에서 흥미로운 텍스트를 발견했는데요. 네덜란드 글로닝언 예술대학교수인 파스칼 길랭이라는 사람의 ‘매핑 더 커뮤니티아트: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창조적 에너지’란 글을 보면 저는 어쩌면 자기 관계적 예술(auto-relational)과 타자 관계적 예술(allo-relational art)사이의 균형을 요구한다는 말에 공감을 하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많은 부분 무늬만 커뮤니티의 활동들은 타자관계적 예술에 가까운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도 예술가의 여러 책무감 중 하나인 다양한 가치의 생산으로써의 자기관계적 예술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제 작업과 활동에 지속적으로 딜레마를 던져주면서 또한 반성하게하기도 하고 활동하게 하기도 하는 주된 고민입니다)

   어찌했던 커뮤니티 아트에 대하여 최근 제기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 중 미시정치학적 관점으로 예술가들이 활용당한다던가, 공공의 현장에서 예술가들이 갖을 수 있는 목회자적 권력이라는 것은 모두다 예술가 그 특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통찰하고, 관계(미학)에 있어서 적어도 이러한 특정의 성격이 만들어 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예술가와 지역(민)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 합의에 의해 커뮤니티 활동의 기획과 과정, 결과물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지만 이 관계(미학)에 의한 상호작용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또한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논의점들이 개인과 소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창조의 툴이라면 저 역시도 이 관계들을 미디엄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와 의미의 도구로 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10. 지역공동체를 대상으로 교육 행위를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입니까? (가령 무늬만커뮤니티 안에서는 무늬만예술학교, 다수가 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이 예가 되겠지요?) How do you define community-engaged pedagogy? (open school, many on many, etc.)

 

이 질문도 참 어렵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매번 적용할 때 마다 그 현장의 맥락에 맞게 재조합 또는 재활용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본적 철학은 바뀌지 않더라도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성경처럼 모두가 인정하고 인용하는 교과서가 있다면 저도 배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공공의 현장에서 지역공동체 안에서 예술가들은 그들의 욕구에 대하여 충분히 사전 조사할 필요를 느낍니다. 당연히 지역의 사회 문화적,역사적 경제적 등등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지역민들이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의제에 대하여 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살펴보고 그 원인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절차 없이 단순히 예술가의 기획을 일방적으로 교육하거나 지역민의 일차적 욕구에 대한 교육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교육 이외의 효과를 가져오기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효과라는 말이 조금 거슬리네요)

   물론 다수가 다수로부터 서로 서로 배운다는 측면은 제가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다양한 차이가 공존하는 교육의 장에서 서로 다름을 배우는 것 자체를 저는 좋아 합니다. 오늘과 내일의 배움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은 또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무늬만의 예술학교는 특정한 시간과 모임을 약속하지 않고 열린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여러 가지로 많은 힘과 에너지 집중력을 소모하게 합니다.(사실 많이 피곤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어느 지역 공동체에서나 모두 적용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방식은 박달2동에서 제가 읽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방식이라는 것은 명시합니다. 잘 조직된 커뮤니티와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가 만들어 질지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강제력을 최소화 하고 구성원의 자율적 선택을 위한 제 나름의 방식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리하게 예술가들의 철학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또한 지역민들의 지나친 욕구들에 건강하게 갈등하면서 서로의 자연스러운 합의점에 이룬 프로그램이 곧 교육입니다. 이는 예술가에게나 지역민에게나 상호작용(상호교육)이라는 측면으로 발화됩니다. 옛술가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역민과의 만남, 관계는 늘 새로운 방식의 놀이,교육, 창작을 생산하게 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가치관에 연동하는 새로운 의미를 찾는 방식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