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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이 있다!

파견미술가 이윤엽이 외치는 소리

                                                                                                                                                                                       김종길 미술평론가

 

2009년 2월 23일, 판화가 이윤엽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용산 여기 사람있다>를 올렸다. 오른송을 번쩍 쳐들고 ‘사람있다’고 소리치는 얼굴 밑으로 새겨 놓은 말, 여기 사람이 있다. 그리고 작품 밑에 다시 딸림 글을 남겼다. “아직도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싸우고 계시는 유족 분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되도록 대책위와 함께 기금마련 판화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3백점 한정 판매이고 가격은 3만원입니다.” 나는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문자의 소리언어에 화들짝 깨었고, 예술노동의 품삯을 싹 빼버린 작품가 3만원에 기진했다. 30만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30만원은 3만원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이었다. 마음이 탔고 시간이 급했다. <용산 여기 사람있다>는 3만원에 수시로 팔렸고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그손, 용산의 오른손이 지금도 내려오지 않고 있다. <용산 여기 사람있다>는 <연꽃 든 사람>으로 <평택쌍용>으로 <사람이 우선이다>로 <암흑을 걷어라 >로 <해고는 살인이다>로 번지고 있다. 번지는 속도만큼 그 수만큼 사태가 난 것이 분명하다. 서울 용산에서 부산 영도조선소까지 투쟁의 현장에 내 걸린 그 손이, 그 상징의 손이 <신나게 당당하게>에 이르러 고통을 연대하는 사람들의 희망의 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남일당에서 85호 크레인까지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옥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점거농성 중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 경찰, 용역 직원이 맞붙었고 결국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었다. 국가는 ‘용산 4구역 철거 현장 화재 사고’라고 일축하지만, 사람들은 ‘용산 참사’라고 통탄했다. 국가는 철거민 5명의 주검을 영안실 냉동고에 얼려둔 채 길게 흥정을 끌었다. 국민을 위한 국가나 정의 따위는 흥정의 저울질 밑에서 끝없이 추락했다. 추락의 뒤 끝에서 여운처럼 메아리처럼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절규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이윤엽은 그 소리를 판화에 새겼다. 흰 종이에 검고 굵은 팔뚝과 얼굴이 선명했다. 그리고 3년 째 이 구어체 육성의 문자는 희비극이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싸움의 현장에서 나부겼다. 이번에는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이다.

2010년 12월 15일 한진중공업은 생산직 근로자 400명의 희망퇴직을 결정했다. 노조는 반발했고 정리해고 전면 철회를 요구했다. 1월 6일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 노조의 김주익 지회장이 농성했고 129일 만에 목을 맸던 크레인이었다. 7월 20일 현재 김진숙은 35미터의 크레인에서 196일째 고공농성 중이다.

 

지난 6월 11일 700여명이 탄 17대의 희망버스가 그곳을 찾았다. 7워 9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195대의 2차 희망버스가 그곳에 집결했다. 한진중공업은 탑승자들을 고소했고 경찰은 출석 요구서를 남발했다. 7월 30일에는 3차 희망버스가 달려갈 것이다. 2차 희망버스 홍보물에 “이 버스는 소금꽃 김진숙의 85호 크레인 농성 185일을 함께 지키는 연대의 버스입니다. 이 버스는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희망의 버스’입니다.”라고 적었는데, 부산역에 1만 명이 눙집했다. 이윤엽은 1차 희망버스 때 “사람은 꽃이다 우리는 꽃이다 노동자는 꽃이다”를 새긴 붉은 꽃 판화를 걸개로 바꾸어 현장에 깔았고, 그보다 먼저 답사 갔던 길에 <용산 사람 여기있다>를 변용한 정면으로 손을 치켜 든 새로운 판화작품 <사람이 우선이다>를 <해고는 살인이다>로 바꾸어 85호 크레인에 걸었다. <신나고 당당하게>와 <가자 한진>은 2차 희망버스가 집결했을 때였다. 전국에서 1차 희망버스로 달려 온 사람들과 노동자들이 한데로 엮어서 한겨레 1면으로 내 걸었던 사진에 <해고는 살인이다>가 크레인에서 나풀거렸다. 높게 걸려서 휘날렸다. ㅣ윤엽은 희망버스가 집결했던 6월의 날들을 그렇게 그가 속한 파견미술팀 동료들과 한께 현장의 곳곳에 그림을 새기며 채웠다. 예술과 행동이 구분되지 않는 날들이었다.

 

예술이 행동을 수반하거나 행동이 예술을 수반할 때가 있다. 둘이 붙어서 실천이 되었을 때 우리는 예술행동주의라 부르거나 행동주의예술이라 한다. 예술이 앞서건 행동이 앞서건 두 개념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는 사회적 모순의 환부가 세상에 들통 났을 때다. 예술가의 촉각이 풍향계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창끝을 고정하듯이 예술가는 모순의 현실을 향해 미학적 투쟁어를 쏘아올린다. 예술행동이다.

이윤엽의 목판화는 그의 촉가이고 투쟁어다. 목판미학의 풍향계는 예술행동이다. 목판이 걸개호 걸릴 때 그 힘은 들끓는 현실을 뚫고 건강한 사회를 향한 희망의 풍향계가 된다. 그러나 3만년을 헤아리는 미술의 역사에서 세계의 환부가 들통 났고, 그 들통 났던 곳으로 치달아 갔던 미술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보이지 않던 모순과 부조리의 세계가 권력의 폭압을 밀어내고 혁명의 물결을 일궜던 19세기에 직립했던 미술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윤엽은 파견미술팀과 함께 조선소의 환부로 달려가 예술행동의 미학을 새겨 넣는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희망퇴직이 들통 났다.

 

프로예맹에서 파견미술까지

우리 미술의 예술행동은 1920년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왜 예술행동을 했고 무엇을 추구했을까? 프로예맹은 1925년에 창립되었으나 그들의 이념은 2년 후에 정리되었다. 1927년 9월 1일 임시총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무산계급운동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을 정확히 인식했다. 그럼으로 우리는 무산계급운동의 일부분인 무산계급예술운동으로써 1)봉건적 및 자본주의적 관념의 철저한 배격 2)전제적 세력과의 항쟁 3)의식 층의 조성운동 수행을 기한다.” 지도이념은 채택한 것이다. 프로예맹이 우리 근현대 예술사에서 예술단체의 첫 예술행동이라면, 김복진이 그 해 ⌜조선지광⌟ 5월호에 먼저 발표한 ‘나형선언 초안’에서 “계급대립의 사회에서 예술의 초계급성을 부정하며, 색채의 야합 층-소위 순정미술의 미안을 벗은 나형으로 모이자”고 외친 것은 한 미술가의 첫 미술행동이었다. 김복진은 프로예맹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이었기에 근대이후 예술행동의 첫 사건은 김복진의 등장과 맞물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러나 프로예맹은 1931년과 34년 두 번의 검거에 따른 일제의 탄압과 내부 갈등으로 1935년 5월, 10년간의 활동을 끝내고 공식 해체했다. 일제 식민지하 프로예맹의 예술행동은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진보적 민족주의 예술 활동으로 깊게 스몄다.

 

해방과 분단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교도민주주의 는 예술행동의 싹을 깡그리 제거해 버렸다.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를 뒤이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예술원의 출현은 국가이데올로기가 rhe 미학의 중추임을 경각시켰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폭압 조작 구속 감금과 법적 살해 즉 공포의 일상화는 예술과 행동을 강제로 구분시켰고 그래서 예술은 다시 국가에 순응하는 ‘순정예술’로 돌아갔다. 또한 남한사회의 강력한 분단이데올로기는 무산계급 예술운동이나 마르크스주의 론에 기반을 둔 어떠한 예술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순정예술의 자율적 예술운동조차도 감시권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전위와 전복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 그 자체로 문명 저항적인 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잊지 않았다.

미술에서 새로운 예술운동의 씨알은 1969년 10월 25일에 터졌다. <현실동인전>의 결속과 창립이었고, 전시의 불발에 따른 ‘선언’의 발표였다. 청년 오윤, 임세택, 오경환이 동인전작가들이라면 청년 김지하는 선언의 집필자였다. 김지하는 <현실동인 제1선언>으로 예술행동의 신호탄을 터트렸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라 역설하면서 “참된 예술은 생동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반영태로서 결실되고, 모순에 찬 현실의 도전을 맞받아 대결하는 탄력성 있는 응전능력에 의해서만 수확되는 열매”라고 주장하고 소리쳤다. 김지하는 그의 현실미학을 곧장 시로 응결시켜 <오적>을 펴냈으나 참혹했다. 그의 시는 감옥과 현실사이에서 파도qh다 더 단단하게 단련되었고 단련될수록 권력은 그를 옥좼다. 현실동인의 오윤이 그를 견디었다면 홍성담은 그를 안고서 살아 올랐다. 그렇듯이 1980년대 민족민중미술은 현실동인 선언의 부리에서 현실미학의 수액을 빨아 올렸다.

 

그 선언의 육성은 2006년 대추리에서 뜨겁게 부활했고 다시 용산에서 힘찼다. 예술가들이 용산으로 집결했고 미술가들은 남일당을 꾸몄다. 걸개를 만장을 조각을 그림을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는 않는 곳까지 설치했다. 무엇보다 미술은 미술이 해야 할 몫을 처리했다. 지나는 사람들의 눈은 미술에 걸렸고 걸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2010년 1월 9일 용산은 장례식과 함께 끝났다. 예나 지금이나 모순의 환부에서 시를 모심기하는 시인 송경동은 그들과의 연대를 이렇게 회상한다.

용산참사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많은 진혼무들을 행했다. 1937년 스페인에서 이반 요리스가 다큐 <스페인의 대지>를 만들 때, 피카소가 홍보 포스터를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넣듯, 아직 이름 없는 작가인 장호경이 다큐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들 때, 만화가 신성식이 삽화를 그렸다.

 

네루다와 그의 친구들이 급히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옹호한다.>를 내듯, 15명의 르포작가들이 대한민국 개발 잔혹사 <여기 사람이 있다>를, 판화가 이윤엽의 작품을 표지에 새겨 냈다. 미술인들은 25년, 30년 넘게 한 가족의 희망이었다가 지금은 버려져 헐릴 처지에 있는 포장마차를 기억과 추모의 예술포장마차로 꾸며냈다.

전국순회 미술전 ‘망루전’과 더불어 고 이상림 열사가 운영하던 레아 호프 1층에서 ‘끝나지 않은 미술제’를 개인전 형식으로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대추리에서 한미FTA와 기륭전자를 지나 오늘 용산에서 이름 없이 함께하고 있는 그들 전진경, 나규환, 이윤정, 정윤희, 김재석, 김기호, 김천일, 배인석 등 그 아름다운 이름들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참사의 기억은 끝나지 않아서 이윤엽과 파견비술팀은 전국을 누볐다. 남일당 뒤 레아미술관에 설치되었던 숱한 파견미술가들의 작품을 들고 서울 인천 부산 전주 대구 광주로 뛰어다녔다. 그들은 망루의 진실과 사회적 의미로 더 많은 사람들이 경각하길 바랬다. 눈발이 휘날리던 장례식. 이윤엽은 어깨 걸고 맨드라미 꽃밭에서 부활하는 다섯 열사의 <부활도>를 판화로 새겨 뽑았고, 전진경도 다섯 열사의 <영정도>를 그렸다. 전미영과 다른 파견미술가들이 그린 만장은 세찬 눈발과 함께 진혼굿의 대미였다.

평택 미군기지에 침탈될 대추리 마을의 빈집으로 들어가 살았던 이윤엽은 황새울 들녘의 솔부엉이를 판각한 바 있고, 콜트·콜텍과 지엠대우, 기륭전자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편에서 파견미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선언하지 않았다. 무산계급예술운동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숭정예술의 미안을 벗은 나형으로 모이라고 호소하지도 않았다. 봉건을 타파하고 자본주의를 배격하며 전제적 세력을 항쟁하기 위해 나서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프로예맹의 신기루와 김복진의 아우라가 그의 활동과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파견미술팀과 프로예맹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흥미롭게도 1969년 현실동인 선언의 현실미학은 2011년의 파견미술팀에 의해 새로운 생존력을 획득하는 듯 하다. 민중미술의 수액이 이윤엽의 목판화를 키운 듯하고 현실미학의 뿌리가 파견미술의 꽃을 틔운 듯하다. 꽃의 열매는 그때나 지금이나 응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파견미술 그리고 오키나와, 제주 강정마을까지

최근 이윤엽의 활동과 파견미술팀의 활동은 평등한 합집합이다. 대추리 예술운동에서 발아한 파견미술은 비정규직 투쟁과 관련된 기륭전자와 GM대우 현장을 함께했고 특히 용산참사 현장에서 결집했다. 그들은 “우리는 개개인의 안락한 작업실에서 왜곡된 권력에 의해 소외된 현장의 한가운데로 기꺼이 급파된다. 이 시대의 고통받는 현장으로 나아가고자 스스로를 파견하는 우리는 파견미술가”라고 밝히고 있다. 2010년 6월의 <끝나지 않은 전시-인정투쟁>의 기록을 보면, 김기호, 나규환, 성낙중, 신유아, 신주옥, 박상덕, 박정신, 이윤기, 이윤엽, 이윤정, 전진경, 전미영, 정윤희 등이 파견미술가로 참여했다. 그러나 현재 파견미술팀의 주 활동가는 나규환, 이윤엽, 전진경, 전미영 등이다. 그러나 오직 그들만을 파견미술팀이라 할 수 없다. 파견미술은 파견(派遣)과 파견(破見)의 두 개념을 합의하는데, 그래서 그들 스스로를 파견보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선을 열거나 깨는 행동주의적 의미도 함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장에서 작가와 일반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실 그들은 이전에도 늘 현장에서 함께했으나 2009년 1월 21일의 용산참사 문화예술계 대책모임구성과 함께 <여기 사람이 있다>l를 제작하며 공식적인 팀 활동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용산참사를 알리는 <끝나지 않는 전시>를 릴레이전으로 기획했으며, <아빠의청춘 - 포차 미술관>, <망루전>를 기획하여 전국 순회전을 치렀다. 그런 그들이 4대강 현장과 콜트 콜텍 농성장, 부산 영도조선소를 오가며 파견미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파견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운동을 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이렇게 내가 다른 삶의 주체로 변이되어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미술이 삶을 떠민 것인지, 삶이 미술을 떠민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미술을 한다는 것.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나로 거듭 태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대추리의 주민으로, 기륭전자분회의 명예회원으로, 다시 용산4가 골목 주민으로 털털하게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사 현장, 투쟁 현장하면 칙칙하고, 무겁고, 어두운 관경들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그 현장에 있어 본 이들은 안다. 그곳이 얼마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해방감으로 충만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의 확인을 통해 얼마나 즐거운 곳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그 소중한 공간을 우리만이 소유하고 싶지 않다. 더 많은 이들이 그 기쁨과 해방감을 나눠 갖게 되기를 바란다.

남한 사회의 곳곳이 들통 나고 있다. 환부가 한 두 곳이 아니다. 어제 오늘 제주 강정마을에서도 긴급을 타진했다. 들통난 것을 덮으려는 해군과 경찰이 다급하단다. 30일, 부산에 집결할 3차 희망버스를 상상하는 경찰의 항문에서 벌써부터 똥줄 타는 냄새가 난다. 이윤엽의 예술행동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런 구린내와 환부로부터 피게 될 연꽃 때문이다. 사람들의 연꽃, 노동자의 연꽃, 모든 희망의 연꽃들 때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이 사라지고, 폭력과 폭압과 권력과 권위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의 맹신과 세계주의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전쟁과 전쟁기계들이 사라진 뒤 피어 날 한 송이 연꽃, 평화 때문이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는 그와 함께 소리쳐야 할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그 소리는 얼마전 오끼나와에서도 울려 퍼졌다. 이나바 마이가 기획하고 사키마 미술관이 초대한 그의 개인전에는 동탄면 목리에서 용산참사까지의 목판화 200여점이 걸렸다. 사키마 미술관이 그를 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키마 미치오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보통, 참된 권력은 많은 방패막이를 하고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민중’은 이중 삼중으로 분단되어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거기서는 진실의 모습을 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모든 것이 벗겨 내지고 그 본질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대추리에서 권력은 외양에 개의치 않고 군대까지 출동시키며 ‘미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오래 동안 만들어 온 풍부한 농지를 강탈했습니다. 60년 전 ‘미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총검과 불도저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오키나와하고 똑바로 겹칩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도 1972년까지 미군정기를 지내야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토지를 미군기지 건설에 강제로 빼앗겼다. 지금 미군은 한반도와 오키나와에서 그들의 전략에 따른 재배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동두천에서 빠지고 평택이 확장되었듯이 오키나와의 헤노코지역에서는 미군의 해상기지 건설이 진행 중이다. 기존의 카데나 기지나 후테마 기지의 소음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고, 기지가 새 기지로 옮겨 가면 발각될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토양오염도 심각하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 문제는 똑같이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진행 중이다. 오키나와는 1972년 미군정에서 일본으로 지정권 반환이 이뤄졌으나, 그 이후로 40년째 미군기지 이설과 반환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싸움중이다.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면 우리 또한 수십 년을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이지 모른다. 이윤엽의 판화는 대추리의 슬픔을 안고 오키나와에 갔으나 그 슬픔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이미 대추리를 다녀간 바 있고 그들은 그렇게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희망의 연대를 일궈내고 있었으니까.

 

사람이 있다고 외치자. 전쟁이 아니라고 평화라고 외치자. 일강정은 살아있다고 외치자. 돌 하나 풀 한 뿌리 그대로 두라고 외치자. 제주 강정마을의 새뱅이와 연산호, 붉은발말똥게, 맹꽁이와 오키나와 헤노코의 듀공을 그대로 두라고 소리치자. 85호 크레인에 김진숙이 있다고 소리치자. 비정규직을 끝내라고 함께 악을 쓰자. 외치고 소리쳐 모순을 부수고 부조리를 깨트리자. 그리하여 그 외침이 평화의 노래가 되게 하자.